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봄꽃들이 만발한 4월 순차적으로 피어야 할 꽃들이 일제히 피고 때아닌 찬바람이 불어와 따뜻한 봄날보다 가을날로 착각하게 하는 날씨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옆 커다란 피칸나무는 열매를 아직까지 매달고 있다가 강한 바람에 가을날 도토리 떨어지듯 떼구루루 떨어진다. 덕분에 양림동 근대유산을 지키기 위해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 모인 광주문화유산지킴이와 시민들은 피칸 하나씩을 손에 들었다.

문화유산헌장을 선창하고 있는 모습<사진 김낙현>

◆ 문화유산헌장을 낭독하며 지킴이 활동을 시작하다

처음으로 참여한 시민들에게 국가유산의 의미와 국가유산지킴이가 하는 활동을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 문화유산헌장도 함께 선창하였다.

최용남 목사의 선교사 묘역 이야기<사진 김낙현>

◆ 양림동 선교역사를 듣다

최용남 목사의 구수한 입담으로 양림동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며 광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우일선(R.M. Wilson: 1880~1963) 선교사 사택에 대한 이야기,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가져와 심은 아름드리 피칸나무, 흑호두나무 이야기, 재중병원 이야기, 희생과 나눔 그리고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교사 묘역에서 단체사진<사진 김낙현>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는 서서평의 마음가짐

서서평은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그녀는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병 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서서평은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했다. 조선인 목회자 등과 함께 50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했는데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고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 명에 달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서서평은 간호사들을 길러내기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조선 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다. 서서평은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을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와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독신 여성의 몸으로 14명의 한국 고아를 양자로 키운 서 선교사. 그녀는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향년 54세에 별세했다. 이후 서서평의 시신은 의학연구용을 기증됐으며, 그녀가 남긴 재산은 자신이 사용하던 담요 반조각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의 슬픔 속에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녀의 시신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서서평은 1930년대 미국 장로회가 전 세계에 파견된 선교사 중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제니의 다락방이 있는 허철선 선교사 사택

◆ ‘제니의 다락방' 이야기

헌틀리 목사의 막내딸로 광주에서 태어난 제니가 겪은 5.18을 그린 동화책이 있다. 헌틀리(한국이름 허철선) 목사 사택에 다락방이 있는데 그곳에 학생들을 숨겨주고 제니가 음식을 날라주는 이야기, 군인들이 찾아왔을 때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을 5.18을 겪지 않았어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선교유적지 주변 정화활동<사진 김낙현>

◆ 양림동 근대유산 퀴즈로 되새기다

플로킹을 하며 양림동 근대유산을 돌아보고 난 후 퀴즈로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시작하면서 예고해서 인지 참여자들은 즐겁게 퀴즈를 맞히며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