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태극기 부표를 배경으로 만세를 외치는 회원들<사진 박미경?

◆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도(所安島)라 했던 곳 일제 강점기 교육만이 독립의 길이라며 소안사립학교를 세운 항일운동의 성지를 찾았다.

◆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거센 항일운동의 성지로 365일 연중 태극기가 펄럭이는 섬으로 임진왜란 때 동복 오 씨와 김해 김 씨가 처음 월항리에 입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항일의 땅 해방의 섬 푯돌 앞에서

◆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소안항까지 하루 10∼12회 운항하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한다.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여객선 3척이 운항하는데, 소안도의 항일 정신을 기리려는 듯 이름이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어느 여객선을 타도 소안도의 자부심이 절로 느껴진다. 화흥포를 출발한 여객선은 노화도 동천항을 거쳐 1시간 만에 소안도 소안항에 닿는다. 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푯돌을 만난다

항일운동기념탑앞에서<사진 김낙현>


◆ 소안도는 일제에 저항한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태극기의 섬으로 거듭났다. 소안도 주민 1300여 명의 집과 도로 곳곳에 태극기를 게양한 것이다. 태극기 게양은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른 규정이 있다. 아무 때나 게양할 수 없기에 완도군은 소안도에서 365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했다. 소안도에 연중 펄럭이는 태극기가 무려 1500여 기 소안도가 태극기의 섬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립소안학교 운동장에서<사진 김낙현>

◆ 이곳엔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함께 소안항일운동기념탑, 복원된 사립소안학교가 있다.

섬 주민의 자발적인 학교 설립 등 일제강점기 내내 다양한 항일운동이 전개된 곳으로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을 비롯해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이 대표적이며 인구가 6000여 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 유공자가 21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68명으로 항일운동의 성지다.

소안 항일운동 서훈자

◆1909년 일본은 본국을 향해 먼바다로 나가는 상선을 돕기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세웠다.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를 비롯한 5명은 일본 선박의 남해 항로를 방해하기 위해 거친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당사도 등대가 생긴 지 불과 2개월 만이다. 당시 불빛을 밝히던 등명기를 파괴하려 했지만, 너무 단단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도 같은 해 시작된다. 소안도는 왕실에 세금을 내는 궁납 전이었는데, 1905년 친일 매국노 이기용이 토지를 사유화하자 소송을 벌였다. 13년 법정투쟁 끝에 승리를 거뒀다. 소송 승리의 기쁨은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안도 주민이 자발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여 1만 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70원인 점을 생각하면 꽤 큰 액수다. 사립소안학교에서 ‘사립’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을 주민이 스스로 세웠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사립소안학교에는 일장기가 없었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항일 정신을 가르쳤다.

노화도를 비롯한 주변 섬뿐 아니라 해남과 제주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뤘다. 여학생의 비율도 25%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립소안학교는 일제에 ‘항일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1927년 강제 폐교된다. 소안도 주민은 격렬히 항거했고,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탄원서를 돌리기도 했다. 이 일로 소안도 주민 6000여 명 가운데 800명이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 되어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살자회 등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감옥으로 끌려간 이웃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송내호 선생이 있다. 사립소안학교의 전신인 사립중화학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썼고, 이후 사립소안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1919년 경성(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불과 2주 뒤, 완도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비밀결사 수의위친계를 조직했으며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살자회 등에 참여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돼 이듬해인 1928년 세상을 떠났다. 사립소안학교는 지난 2003년 복원돼 평생학습원과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은 독립유공자 송내호 송기호 묘소를 찾아 참배도 하였다. 죽어서도 일본땅을 보지않는 방향으로 묘소를 잡았다.

송내호 송기호 묘소

※ 참고자료
완도군청 사이트 및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소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