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수도였던 중국 시안에서 신라 왕족의 무덤이 발굴되어 학계가 촉각을 모으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김영(金泳)이라는 인물로, 3대째 당에 거주하면서 당과 신라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던 '질자(質子)' 신분으로 파악된다.

무덤은 시안 옌타구(雁塔區) 동강촌(東姜村)에 위치하여 당 장안성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무덤에서는 12지 등 도용(도자기 인형)을 비롯해 동전, 묘지명 등 84점의 많은 유물이 보고되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묘지명(墓志銘)이다. 묘지명은 무덤 주인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 김영 본인과 선대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8세기 당과 신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김영 묘지명

[陕西省考古研究院, 陕西西安唐新罗质子金泳墓发掘简报, <考古与文物>, 2025-6]


김영 묘지명에 따르면, 김영은 당나라 현종 천보(天寶) 6년(747년)에 당에서 태어나, 덕종 정원(貞元) 10년(794년)에 장안성 태평리(太平裏)의 관저(館第)에서 48세로 사망했다.

김영의 조부는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당형(堂兄: 사촌형)인 김의양(金義讓)이며, 당 현종대인 개원(開元, 713~741) 초기에 신라 국왕의 명으로 당나라에 들어와 궁정 숙위(宿衛)를 맡았다고 한다. 김의양은 당에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김영의 부친이며 중산대부(정5품상)와 광록소경(종4품상)에 제수되는 등 김의양-(장남)-김영 3대에 걸쳐 당나라 조정에서 고위직을 맡으며 '질자'를 계승하며 장기간 체류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신라왕족 김영의 가계도

Ⓒ 고현정

'질자(質子)'는 본래 교환 과정 중에 물품을 저당하는 행위 혹은 저당 잡히는 물품을 가리키는 경제적 의미를 지닌 ‘질(質)’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것이 외교적 수단으로서 그 구체적인 담보 대상이 일반적으로 군주나 유력 대신의 자제였던 데에서 생긴 용어이다.

안정준 교수(서울시립대)는 "당은 질자들로 하여금 궁궐에서 황제를 숙위(宿衛)하게 하고, 봉선(封禪)과 같은 의례에 참석시킴으로써 황실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만 본국의 입장에서 질자는 당의 내부 정세 및 본국의 안위와 관련된 정보를 몰래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결코 불리한 존재만은 아니었다."고 설명하며, 8세기 중반 당시 신라 왕족 출신으로서 장안에 머물며 당 현종 등을 숙위하고, 당의 귀족 가문 여성과 혼인하여 살다가 774년 4월 장안에서 사망한 김일성(金日晟)의 사례도 있음을 지적했다.

묘지명에 나타난 김영의 활동은 '질자'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768년, 785년 두 차례 신라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고 그때마다 관직이 거듭 내려지고 있다. 특히 785년의 신라행은 원성왕의 책봉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데, 원성왕은 김영이 '번장(蕃長)’도 겸하도록 당에 건의하기도 했다. 번장은 당~송 시대에 외국이민자나 유민 사회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보통 해당 민족 출신의 명망가가 맡는 것인데 김영은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 중 유일하게 '번장'의 직책이 명시된 인물이기도 하다. ·

김영 무덤의 묘실 내부

[陕西省考古研究院, 陕西西安唐新罗质子金泳墓发掘简报, <考古与文物>, 2025-6]


한편, 김영이 당으로부터 받은 관직 중 ‘등주제군사(登州諸軍事), 등주자사(登州刺史)’의 '등주'가 들어가는 부분이 주목된다. 이는 정3품의 도독직으로 상당한 예우였을 뿐만 아니라, 등주는 본래 발해·신라에서 당나라로 오가는 사절단과 무역선이 반드시 거치는 주요 항구이자 신라방・신라소 등 신라인의 무역과 관련된 곳이었다. 이번 발견은 고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질자제도가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 국제외교의 고대적인 형태로 이해되어야 할 여러 단서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은 김영 묘지명의 전문이다. 판독문의 교감과 해석은 서울시립대 안정준 교수의 보고서를 참조했다.

<판독문>

唐新羅國故質子蕃長朝散大夫試衛尉少卿金君墓志銘

廣文館進士從姪良說撰

維唐貞元十年五月壹日, 試衛尉少卿·質子·蕃長金君終於京兆府太平里之館第. 鴻臚以奏, 聖上宸悼, 錫以優例, 詔賜使持節·都督登州諸軍事·登州刺史, 賻贈疋帛. 及葬日, 官給車轝·縵幕·手力, 兼賜詔祭棺槨·墓地等, 仍令長安縣令專知葬事者. 以其年八月十四日, 窆於城南畢原之北府君叔父之次, 禮也.

君諱泳, 其先祖即本新羅國故王堂兄, 開元初以差入朝宿衛於皇朝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諱義讓, 則君之祖也. 因宿衛而有三男留於闕下, 其長子皇授中散大夫·可光祿少卿, 則君之考也. 以父之胤而襲其質者, 則君也. 大曆三, 恩命差爲宣慰副使還國, 授將仕郎·試韓王府兵曹參軍. 宣命畢而復歸, 恩命優加重賞, 授朝散大夫·試太子洗馬. 丁太夫人憂, 居喪三年, 哀過於禮. 服闋, 以貞元元年本國王薨, 又差爲吊祭冊立副使, 拜試衛尉少卿, 再奉於使往來, 勒勞滄海.

遂本國王特奏官兼蕃長者, 風俗廣通於海隅, 禮義大興於東國. 因遘疾而不▨, 春秋卌有八. 嗚呼!君自爲卿長以來, 兩國使命, 見者無不稱其德, 朋友無不稱其賢. 不壽而終, 時人惜也. 夫人太原王氏, 東畿偃師縣令千齡之子也, 賢比姬薑之淑女, 貴則卿監之夫人, 其貞元四年四月十四日逝於同館, 權厝於城南之原.

有男九人 嗣者士素, 應明經舉;次曰士弘;次曰士烈, 尊君痼疾, 願爲父出家. 女子三人, 長者已適事人. 餘者悉幼, 而乃抱棺泣血. 良說忝爲從姪, 故錄其功列, 述茲遺行, 冀宣孝訓, 不飾其文. 銘曰 哀哉月卿, 化爲異靈. 舊質聖朝, 魂寄幽冥. 蔔地南崗, 鐫石記名.

<해석문>

당(唐) 신라국(新羅國)의 고(故) 질자(質子)・번장(蕃長)・조산대부(朝散大夫)・시위위소경(試衛尉少卿) 김군(金君)의 묘지명

광문관(廣文館) 진사(進士)이자 종질(從姪)인 양설(良說)이 찬하였다.

당 정원(貞元) 10년 5월 1일, 시위위소경(試衛尉少卿)・질자(質子)・번장(蕃長)인 김군은 경조부(京兆府) 태원리(太平里)의 관저(館第)에서 숨졌다. 홍로(鴻臚)가 이로서 주청하였는데, 성상(황제)께서 깊이 애도하시고, 특별히 우대하는 예우로서 조(詔)를 내리시니, 사지절(使持節)·등주제군사(都督登州諸軍事)·등주자사(登州刺史)의 관직을 추증하고, 비단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셨다. 장례일에는 관(官)에서 수레와 장막・인력을 제공하였고, 겸하여 조서를 내려 제사용 관・곽과 묘지(墓地)를 내리게 하였으며, 장안현령(長安縣令)으로 하여금 장례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해 8월 14일, 성 남쪽 필원(畢原)의 북쪽에 있는 부군(府君)의 숙부 묘역 옆에 장사지냈으니, 예에 맞는 것이었다.

군은 이름이 영(泳)이니, 그 선조는 본래 신라국의 옛 왕의 사촌형(堂兄)이었다. 개원(開元) 연간 초에 차출되어 황조(皇朝)에 입조하여 숙위(宿衛)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시태상경(試太常卿)의 관직을 받았던 의양(義讓)은 곧 군의 조부이다. 숙위함에 인하여 세 아들이 궁궐 아래(장안)에 남게 되었는데, 그 장자(長子)는 황제께서 중산대부(中散大夫)・광록소경(光祿少卿)을 내렸으니 곧 군의 부친이다. 부친의 혈통으로서 그 질자(質子)를 계승하였으니 곧 군(김영)이시다. 대력(大曆) 3년 (황제의) 은명(恩命)을 받아 차출되어 선위부사(宣慰副使)가 되어 (신라로) 환국했고, 장사랑(將仕郎) 및 시한왕부병조참군(試韓王府兵曹參軍)의 직을 받았다. 선위(宣慰)의 사명이 끝나고 다시 (당으로) 귀국하자, 은명(恩命)으로 더욱 무거운 상을 더하시니, 조산대부(朝散大夫)와 시태자세마(試太子洗馬)의 직을 내려주셨다.

태부인(太夫人: 모친 추정)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는데, 슬퍼함이 예(禮)를 넘었다. 상복을 벗은 후, 정원(貞元) 원년(785년)에 본국왕(신라 선덕왕)이 돌아가시자, 또 차출되어 조의를 표하고, (왕을) 봉하여 세우는(冊立) 부사(副使)로서 파견되었고, 시위위소경(試衛尉少卿)의 관직을 받았다. 재차 사행(使行)을 받들어 왕래하며 큰 바다(滄海)에서 수고를 감내하였다. 마침내 본국왕(신라 원성왕)이 특별히 주청하여 (기존) 관직에 번장(蕃長)을 겸하게 하였으니, 풍속은 바다의 한구석(먼 지역)까지 널리 통하고, 예의는 동방의 나라에서 크게 일어났다. 병을 얻었는데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마흔여덟이었다.

아아! 군(君)은 경장(卿長, 높은 관직자)이 된 이후로 양국 간의 사행의 명을 수행하였고, 그를 본 자들은 그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친구들은 그의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을 마쳤으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夫人)은 태원왕씨(太原王氏)로, 동기(東畿) 언사현(偃師縣) 현령인 천령(千齡)의 딸이다. 그녀의 현명함은 희강(姬姜)의 숙녀에 견줄 만하고, 귀하기로는 경·감(卿監)의 부인에 필적하였다. 정원(貞元) 4년(788년) 4월 14일, 동관(同館)에서 세상을 떠나, 성 남쪽 언덕에 임시로 관을 안치했다.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계승자는 사소(士素)로,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다. 다음은 사홍(士弘), 그 다음은 사열(士烈)인데, 아버지가 오랜 병환이 있음을 중히 생각하여 아버지를 위해 출가(出家)하고자 하였다. 딸이 셋이 있었는데, 장녀는 이미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어려서 관을 껴안고 피눈물을 흘렸다. 양설(良說)은 감히 종질(從姪)이 되기에 고로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고, 남긴 행장을 서술하였으니, 이는 효도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길 바람이며, 그 문장을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명(銘)하여 이르되:

슬프도다, 월경(月卿)이여, 화하여 다른 혼령이 되었구나. 과거에는 성조(聖朝)에 맡겨졌었고, 영혼은 그윽한 저승에 기거했도다. 남쪽 언덕에 장지(葬地)를 정하고, 돌에 새겨 이름을 기록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