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1696양향교의 홍살문과 입덕문

언양향교는 조선시대 나라에서 운영하던 관학이다. 1937년 '향교중수기'에 따르면 언양에는 향교가 처음 군 북쪽 1리쯤의 반월산 아래 있었고, 남천 남쪽3리쯤 덕천으로 옮겼다가 성 서쪽 2리쯤의 화장산으로 다시 옮겼고, 숙종 22년에 마지막으로 덕천으로 옮겼다' 하였다. 숙종 22년(1696년)에 대성전을 완공하고, 숙종 26년(1700년)에 명륜당을 완공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언양향교는 다시 이건하지 않고 중수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러고 있으며, 대성전, 명륜당, 동재,서재, 전사청, 입덕문, 내삼문이 있다.

언양향교의 배치는 전학후묘로 제향기능이 남아있는 대성전과 강학기능이 남아있는 명륜당영역을 나눈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4聖, 송조2현, 아국18현의 신위를 모시고있는 공간이다.

언양향교의 정문은 입덕문(入德門)으로 누문(樓門)이 아닌 수법이나 형식에서 비교적 격조 높은 건물이다. 정면 3칸 평면 1칸의 평면형식이다. 향교가 처음 설치된 때는 고려시대이나 국가의 지방 교육기관으로 활발하게 발전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향교의 교육 내용은 유학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시대 향교 교관의 명칭은 교수관과 훈도관으로 6품 이상은 교수관이로 7품 이하는 훈고관이다. 군 ·현 향교에는 훈도관을 1명씩 파견하였다. 고려 때부터 교도관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언양향교에는 언제 교도관을 파련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햐면 매우 이른시기에 언양에 유교가 전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언양의 선현들이 고려말에 3년 상을 이행하고 장례와 제례를 '주자가례'에 따랐다는 사실은 여말선초에 이미 언양에 성리학과 그 더곡이 전파되었음을 알려준다.

언양의 유교문화는 언양향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용한의 '염수헌문집' 에는 향교에 관련 된 시가 있다.

남쪽 고을 유람 길에 / 말 타고 가면서 시도 많이 지었네/ 늙은 홰나무에 바람이 불어오니/ 푸른 풀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멀리 거문고소리 들여오니/ 선비들은 대성전 제사를 전하네/ 읍성은 북쪽에 향교는 남쪽에 있어/ 한잔 술에 마음은 아득하네

향교의 교과는 사서오경, 소학, 효경, 삼강행실, 향약, 가례등이 이었다. 현재도 언양향교 평생교육원에서는 논어를 비롯한 경전 학습반이 여러 강좌 운영이 되고 있다.

논어는 2,600여년 전 공자의 언행을 후대에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사상은 仁 사상이다. 공자는 지식을 가르쳤다고 하기보다는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그 상황에 맞추어 가르침을 펼친 탁월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 11편 '선진'에 따르면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 곧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좋은 말을 들어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잠시 후, 제자 염유가 와서 물었다. "선생님,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럼,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지." 라고 했다.

그 옆에서 듣고 있던 공서화가 같은 질문을 다르게 대답한 공자에게 의아해서 물었다.

"자로는 남을 이기려 하기에 물러서도록 한 것이고 염유는 소극적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한 것이다."

육포 한 속수 있으며 제자로 받아 주었다는 공자의 가르침, 자신의 안위보다 모든 사람이 다 편안하게 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소인보다 군자의 삶을 원하는 언양향교가 언양 지역민들의 즐거움 배움터, 문화예술의 장(場)!

현대에서도 지역사회의 교육의 메카로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