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는 7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며, 소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번영의 시절을 구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영토 바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와 조사의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발해 문자자료에 대한 목마름은 오래되었는데, 최근 중국에서 용두산 왕실고분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어 학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발해 효의황후·순목황후 묘지명이 드디어 베일을 벗게 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박지향) 「발해 용두산 왕실고분 발굴보고서」 분석 보고회를 9월 5일(금) 재단 중회의실에서 개최하여 용두산 발해고분 전반을 소개하고 효의·순목황후 묘지명의 판독과 해석, 그리고 그 의미까지 다루었다.

효의황후 묘지(墓誌)
775년 제작. 총 981자.
출처: 『龙头山渤海王室墓地:1997、2004-2005、2008年发掘报告』


발해 효의황후·순목황후의 묘지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2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허룽현(和龙县)에 소재한 용두산(龍头山, 중국명: 롱터우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총 길이 약 24km의 산으로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아 한 마리의 용을 연상케 한다.

이 산에서는 석실묘, 전실탑묘 등 20여 기의 발해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그 중에는 발해 제3대왕 대흠무의 딸이었던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792년 사망)와 비 효의황후(775년 사망), 제9대 간왕의 비 순목황후(827년 이장)의 무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장자를 알 수 있는 것은 이 무덤들에서 무덤 주인의 내력을 적은 묘지(墓誌)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묘지명 중 유일하게 공개된 것은 정효공주 묘지명뿐, 발굴이 끝난 이후 오랫동안 두 황후의 묘지명이 공개되지 않으면서 그 내용은 물론, 공개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수많은 억측이 쏟아졌다.

발표하는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선임연구위원

보고회는 김은옥 전통문화대학교 강사가 '용두산고분군 유적 소개와 특징'이란 주제로 중국측 보고서의 발굴 조사 내용을 분석했으며,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선임연구위원은 '발해 황후묘비 발견과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기존 공개된 발해 정혜공주, 정혜공주 묘비와 아울러 효의황후, 순목황후 묘비의 발견 의미에 대해 논했다.

용두산 고분군

출처: 김은옥 박사 발표자료


◇ 효의황후와 순목황후는 누구?

효의황후는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비이며, 순목황후는 제9대 간왕 대명충의 비이다. 두 무덤은 모두 용두산 고분군의 중간 지대인 용해구역의 근거리에 위치하며, 무덤의 형식은 고구려의 영향이 엿보이는 대형석실묘다.

이번 중국측 보고서에서 공개된 효의황후와 순목황후의 묘지명은 기대 이상으로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에 그 판독이나 해석에 있어서 큰 이견이 없다. 효의황후는 울(欎)씨이며, 순목황후의 성은 태(泰)씨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기존 발해 성씨 중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는 울씨와 태씨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효의황후 울씨는 원래 후궁 신분에서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이전하는 755년 무렵에 황후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묘지명에 나온 나이와 근거리에 묻힌 정혜공주(문왕의 딸)와는 12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둘의 관계는 친모녀 관계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울씨는 중원계가 아닌 선비·말갈 등 북방민족의 성으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발해 역시 다종족 국가였음을 확인하게 하는 부분이다.

한편, 순목황후 태씨는 용두산이 처음 시신이 매장된 곳이 아니라 이장지에 해당한다. "선비 불이산 언덕에 (임시로) 묻었다"고 하여 사망 장소가 선비(거란) 지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효의황후에 비해 매우 짧은 묘지명도 그렇거니와, 9세기 초 불안정한 왕위 계승 상황이나 국제정세의 혼란 속에서 장례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순목황후 묘지명 탁본

829년 제작. 총 41자.

출처: 『龙头山渤海王室墓地:1997、2004-2005、2008年发掘报告』


◇ 묘지명에 나타난 발해의 독자적 천하관

발해가 독자 연호를 썼다는 것은 『신당서』 등 사서를 통해 확인되지만, 역사 기록에 누락된 연호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정혜·정효공주 묘지명에서 문왕의 '보력(寶曆)' 연호로 확인되었다. 이번 순목황후 묘지명에서는 '연평(延平)' 연호가 추가적으로 나왔는데, 어느 왕이 연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추가 연구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효의황후 묘지명에서는 '성조(聖朝)', '황상(皇上)' 등으로 발해국과 국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한 점이다. 또한 '(황후의) 덕은 동국(東國)에서 높고"라는 표현에서 중국과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동국'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향후 발해사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

이날 보고회에는 고대사 연구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이 발굴보고서가 황후 묘지명뿐만 아니라 다양한 왕실 고분의 정보를 담고 있어 앞으로의 발해사 연구에 큰 도약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여러 묘지명에서 공통되어 나오고 있는 '진릉(珍陵)' 혹은 '진릉대(珍陵臺)'가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따라 발해의 건국지 및 초기 중심지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용두산 고분 내의 고분 배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발해 왕실 계보에 대해서도 더욱 구체적인 추정이 가능해지고, 묘지명이나 무덤 양식에서 엿보이는 풍부한 불교 사상은 더욱 풍부한 발해 사상사를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칠합(13호묘 출토)이나 와당과 벽돌, 우물, 발해삼채 등 많은 고고자료가 나오면서 발해 고고연구 편년도 보다 정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용두산 고분군 전반에 대해 연구진을 꾸려 올해 안에 연구발표회를 진행하고, 재단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동북아역사논총』 12월호를 발해 용두산 고분군 특집으로 준비할 계획이다. 가뭄에 단비같은 신자료의 공개로 고대사학계는 당분간 활기를 띨 전망이다. 이 계기로 중국과의 학술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