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35년 선덕여왕 4년 4월에, 한 어부가 인형 같은 돌덩이 22개를 건져 버리고 또 건져 또 버렸다. 꿈에 노승이 나타나 귀중한 성물을 두 번씩이나 버렸다고 나무라면서, 다시 건지거든 명산에 봉안하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다시 건졌기에 섬에 뻗어 오른 산으로 옮기는 데 중턱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져 “이곳이 바로 영장(灵場)이구나” 단을 쌓아 올려놓았다.

22개의 성물은 삼신산이 품어 나날이 영롱해졌다. 고려 초, 금강산 보덕굴에서 관음 진신을 친견한 회정대사가 이에 이르러 살펴보고, 석가 미륵 3존과 18 나한상임을 알고 관음전을 지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관음보살이 하강했다는 산 이름을 붙여 낙가산 보문사라 했다. 석굴에 무지개 형제인 세개의 홍예문을 열고, 삼 세 번 건져 올린 22개 돌로 행주를 세워 21칸 석불을 모셨다.

21은 단군네 탄생 숫자로, 단군네 탄생 소원이 이루어지는 삼신 도량의 성지가 되었다.

불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과 법보호(法報化)의 삼신불(三身佛)의 좌우에 양대 보살을 갖춘 산존불(三尊佛)을 법당에 모신다. 우리나라는 석가 삼존불을 모신 법당을 단군전을 상징하여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면서, 민족정신 문화를 병행하는 미륵신앙을 결부시켜 석가삼존에 미륵보살을 안치하며 불교를 넘어 국가 보물이란 의미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했다. 회정대사가 이에 이르러 석가와 미륵보살 삼존을 밝혀, 보문이 민족 성지임을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