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을 시작하며 한우열 회장의 국가유산지킴이 활동 이야기

무진주국가유산지킴이는 광주광역시 소재 3 서원(유애서원, 무양서원, 월봉서원) 3 가옥(김봉호 가옥, 용아생가, 장덕동근대가옥) 3 정자(풍영정, 호가정, 만취정)를 지정하여 매월 정기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활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로 46번 길 24에 위치한 용아생가에서 진행하였다.

◆ 한우열 회장은 용아생가를 찾은 청소년 및 참여한 시민들에게 국가유산지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국가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분류하며 이곳은 문화유산 중 목조문화유산으로 함께 활동할 마루 짚솔 청소 및 콩댐 작업과 주변 잡초제거에 대해 안내하였다.

짚솔로 먼지를 닦아내고 있는 모습


◆ 안채 마루는 니스칠을 한 흔적이 있어 짚솔 청소만 하고 사랑채는 짚솔 청소 후 콩댐작업을 실시하였다. 전통가옥의 나뭇결을 살리고 오랜 세월 유지를 위해서는 자연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콩댐을 한 마루는 반짝반짝 윤이 나 함께 한 시민들은 마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해설사로부터 용아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콩댐작얿하는 모습

◆ 용아생가는 시문학파를 형성해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 시인이 태어난 곳이다. 용아는 눌재 박상의 후손으로 1916년 광주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정신을 키웠고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 다닐 때 영랑 김윤식과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다 자퇴하고 광주로 내려와 16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뒤 누이의 친구 임정희와 재혼한다. 이때부터 용아는 문학활동을 하게 된다. 1930년 정인보, 변영로 등과 <시문학>을 창간하고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 등 문예잡지와 시문학 동인이었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김영랑의 <영랑 시집>을 간행하였다.

용아생가 입구

◆ 1930년에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1931년 용아는 시 창작보다는 <문예월간>을 창간하고 해외문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여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서 우리 나라 최초의 연극 전문지 <극예술>을 창간하였다.

◆ 용아생가는 19세기 후반 용아의 고조부가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슬레이트 지붕이었던 것을 1995년 원래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초가인 이 집을 용아의 아버지가 기와지붕으로 개량하려고 하자 용아는, ‘시골집은 초가라야 어울립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초가 이엉은 2년에 한 번씩 잇는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지만 수목과 초본들이 너무 많아 관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숨 쉴 공간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나무가 있고 여유공간 없이 다양한 화초와 잡초가 뒤섞여 있다. 이에 지킴이 활동에 참여자들은 제초작업을 실시하였다. 장독대 주변에 올라오는 찔레나무를 제거하고 무성하게 자란 살갈퀴, 쑥 등을 제거하였다. 잡초들을 제거하자 동백꽃이 낙화하여 땅에서 다시 피어나고 하얀색에 연둣빛 점을 찍은 설강화가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하다. 국가유산은 혼자의 힘보다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한다.

잡초를 제거하고 있는 모습

◆ 문화유산 정화작업을 마치고 문화유산 현장에서 전통놀이 체험활동으로 비석 치기와 투호놀이를 실시하였다. 비석 치기 게임에 빠져들면서 오랜만에 용아생가는 시끌벅적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전통놀이 비석치기(왼쪽), 투호놀이(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