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영정(현충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일기에 남겼다. 그것은 처음부터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므로, 본문에는 “난중일기”라는 말이 없다. 7년간의 일을 연도별로 나누어 임진·계사·갑오·을미·병신·정유·무술일기로 작성한 것이다. 1795년 활자본 『난중일기』가 나오기 전에는 실학자 서유구(徐有榘)에 의해 『충무일기(忠武日記)』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제명(題名) 방법을 따른 명칭이다.


『난중일기』는 날짜별로 날씨, 시간, 장소, 인물, 업무, 사건 등이 순차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그 외 저술자의 생각에 따라 진중(陣中)의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명대(明代) 하징명(賀復徵)의 『문장변체휘선(文章辨體彚選)』에 “일기란 자질구레한 이야기[쇄설(瑣屑)]이 모두 구비된 것이 묘미다”라고 한 것처럼 『난중일기』도 전형적인 일기형식을 갖추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진영에 나아가 공무를 본 것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고, 전쟁 중 출동과 작전 상황 및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 참모와 부하들이 보고한 내용, 각 관청에 공문을 발송한 내용이 자주 보인다. 또 일기 사이에는 자신의 심정을 담은 문장과 자작시를 비롯하여 장계·편지 등의 초안도 적혀 있다. 대장의 진영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소재로 하여 작성된 『난중일기』는 진중의 종합적인 기록으로서 사료적인 성격이 매우 풍부하다.

물론 임진왜란 중에 작성된 또다른 일기류가 존재한다. 오극성·오희문·이로·정탁·조정·사명당·이정암 등의 일기를 들 수 있는데, 이와 다르게 『난중일기』는 최고지휘관이 7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며 직접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이 점에서 『난중일기』는 실기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 『난중일기』에 대한 관심은 이순신의 전공(戰功)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그 당시와 후대의 인물들은 이순신의 전공에 대해 남다른 평언을 남겼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선조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이 천하를 경영할 재주와 세운을 만회한 공로가 있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칭송하였다.(신도비명, 시장, 징비록, 충무공유사 등) 이식(李植)은 “이순신의 절개와 충성심, 용병술은 옛날의 명장들 보다 뛰어났다”고 하였고,(시장) 윤휴(尹鑴)는 “쇠퇴한 세상에 처하면 마음이 슬퍼지고 생각이 주도면밀해지는데, 이것은 통제사만이 가능한 일이다.”라고 하였다.(충무공유사)

송시열(宋時烈)은 “수십 차례의 전쟁에서 온전히 승리한 것은 중흥의 위업에 기초가 되었다”고 하였고, 이이명(李頤命)은 “이공(李公)의 큰 전공은 실재 중국천하에까지 미친다.”라고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이순신이 세운 공로는 천년토록 송축 받을 것이다”라고 하고, 신채호(申采浩)는 “병화가 칠팔년에 이르니, 부패한 국정과 산만한 인심이 이순신에 의해 회복되었다”고 하였다. 김정희(金正喜)는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해상방어전략이 이충무공(李忠武公)과 일치한다고 해서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고 하였다.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과 전략, 용병술, 전공에 대한 역대 인물들의 평가가 후대에 전승양상을 보인 것이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은 일찍이 “우리나라의 장수 재목으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문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덕행을 보는 것은 문무에 구별이 없이 해야 한다. 내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무신도 반드시 덕행을 보아야 이와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경세유표(經世遺表)』「하관수제(夏官修制)·무과조(武科條)」) 『난중일기』를 읽고 감동한 이유가 전공 보다는 모친을 걱정한 효심였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후한서(後漢書)권56』 「위표열전(韋彪列傳)」에,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求忠臣必於孝子之門)”는 말이 있다. 효(孝)는 백행의 근본이자, 인간사회 윤리도덕의 근간이다. 일기의 첫장에도 여수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회한(悔恨)을 느낀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전쟁을 소재로 쓴 『난중일기』에 어머니에 대한 효(孝)가 중심을 이룬 점에서 인간의 도리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결사적으로 싸워 불패의 전공을 세운 것도 결국은 어머니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는 당부를 따른 효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계기록유산인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위대한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인성교육의 지침서이다. 후대에는 이것을 온전히 보존 관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분실된 을미일기 초고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난중일기』가 비록 일본인에 의해 전편이 해독되었지만, 오독내용은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친필 초고본의 누락된 내용, 초고본과 활자본의 차이, 원문의 해석이 서로 다른 이유 등은 고전학의 전문영역으로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원뜻에서 벗어난 자의적인 해석은 지양해야 한다. 저자의 의경(意境)과 문장의 바른 이치이란, 정확한 원전에서 의미를 되새길 때 드러난다. 유협(劉勰)이 『문심조룡』에서 “분별을 확립하는 것은 명확한 언어 판단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辯立有斷辭之義)”라고 말한 것은 언어 표현에 있어 시비의 변별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글 : 노승석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여해고전연구소장

역서 <교감완역 난중일기 개정3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