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의 절대적 가치로 충·효·열(忠·孝·烈)을 숭배하고 요구되던 시대에는 뛰어난 충신·효자·열녀가 출현한 가문에는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 모범 된 그 행적을 비(碑)에 새겨 고장과 가문의 영예와 자랑으로 삼았다.

밀양시 산외면 박산(博山)마을 도로 아래쪽에는 손금지(孫今之, 孫金枝)의 정려(旌閭)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1년(1490) 6월 20일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효녀 금지 정려(각)

「경상감사가 계문(啓聞, 관찰사·어사 등이 임금에게 글로 아룀)한 효자, 효녀 4인의 행적에 대해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 조선 세대 충신·효자 등에게 조세·부역을 면제하던 일) 하도록 명한다. 임금이 이보다 앞서 전지(傳旨, 임금의 명을 관아에 전달)를 내리기를 효자와 열부는 간혹 지극히 미천한 자에게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대개 일상의 예의를 지키려는 천성이 일찍이 소멸(消滅)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번 격발(激發, 기쁨·분노 등의 감정이 거세게 일어남)시키는 바가 있으면 착한 마음이 곧 싹트는 것이니 윗사람이 가상히 여겨 장려토록 하는 것은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데에는 이보다 절실한 바가 없다. 그러니 여러 도(道)에 효자와 열부를 널리 물어서 치계(馳啓, 임금에게 급히 서면으로 상주함)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즈음에 조이(曺伊)라는 밀양의 여인이 딸 금지를 데리고 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어미가 금지를 데리고 집 북쪽 산의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있는데 뜻밖에 호랑이가 나타나 어미를 잡아끌고 가니 어린 금지가 죽을 마음을 먹고 내달아 한 손으로 어미의 다리를 잡고 거의 백 보에 이르러 주먹에 쥔 돌로 호랑이를 때리자 호랑이가 어미를 내버리고 갔다. 그 어미를 보니 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므로 금지가 입고 있던 베로 깨끗이 닦아 내고 시신(屍身)을 안고 지키다가 옷을 팔아 관곽(棺槨, 널)을 사고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냈다고 한다. 경상감사가 그 행적을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였으므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정문(旌門)하고 복호토록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금지가 12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밀주지(密州誌, 1932년, 박수헌)에도 금지가 12세 때 일이라고 하면서 금지의 성은 손씨(孫氏)로 정려에 적힌 금지이며, 나중에 커서 백익형(白益瀅)에게 시집을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효녀 금지 이야기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는 1434년(세종 16)에 만든 삼강행실(三綱行實圖)도 이후에 생긴 충신·효자·열부를 추가하여 1514년(중종 9)에 대제학 신용개(申用慨)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책이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만들어졌으나 1530년(중종 25)에 일부 증보(增補)하여 55권으로 만들었는데, 이곳에도 금지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단장면 구미(사촌)에 사는 금지가 16세에 산외면 박산마을에 사는 백익형에게 시집와서 19세 때 시어머니인 경주 김씨를 모시고 채전(菜田, 남새밭) 밭에 갔다가 호환(虎患, 사람이나 가족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함)을 만나 시어머니 대신 자신을 물어가라며 200여 보를 쫓아갔는데 미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수원백씨 집안에서 세운 효부통덕랑백익영처손씨지려(孝婦通德郞白益瑩妻孫氏之閭)에는 위의 내용과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산외면 박산마을에 젊은 내외가 첫아기를 낳아 살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산비탈 밭에 부추를 캐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기다리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보이지 않자 나가 보니 호랑이가 시어머니를 물고 가고 있기에 아이를 업고 호랑이를 따라갔다. 며느리는 호랑이를 보자 어머니를 놔두고 이 아이를 업고 가라고 했다. 며느리가 끝까지 호랑이를 따라가며 어머니를 내놓으라고 하자 마침내 호랑이는 어머니를 내려놓고 대신 아이를 물고 갔다. 며느리는 기절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집 방안에 모셔 두고 저녁 준비를 했다. 나무를 하러 갔던 남편이 아내를 보고 아이는 어데 갔냐고 자꾸 캐묻자 아내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다시 못 볼 것이라서 그랬다고 울면서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문밖으로 나가 아내한테 자꾸자꾸 절을 했다. 이튿날 아침 내외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밖에 나가보니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마도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아이를 집 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한다.」

효부통덕랑백익영처손씨지려

이야기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오는 것은 원래의 사실에다 조금씩 살을 붙여 확대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금지의 행적(行績)이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조선왕조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릴 정도의 널리 알려진 이름난 효녀라는 점이 중요하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만연(蔓延)하면서 노부모 부양으로 인한 가족들의 갈등, 노인학대, 형제간의 재산 다툼 등 반인륜적 행위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제 한 몸, 제 자식의 안위(安慰)와 이득에만 혈안인 이기적인 현 세태 속에서 빛바랜 정려각을 바라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만은 예로부터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 했거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어떤 가치가 효(孝)를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효(孝)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부인(否認)할 수 없다.

대망의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시작되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효녀손금지정려(孝女孫今之旌閭)’를 찾아 효(孝)의 현대적 의미와 인륜(人倫)에 순응하는 삶을 새겨보는 것도 새해를 시작하는 뜻깊은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