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의 치사가(위의 좌측), 측은한 보물 궤장: 보물 제930호(위의 우측), 전 김홍도필 담와 홍계희 평생도 중 치사: 국립중앙박물관(아래) - (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김낙현)

[광주광역시=헤리티지뉴스] 오늘날 직장인들에게 '정년(定年)'은 법적 의무이자 생애 주기 전환의 분기점이다. 그렇다면 유교적 예법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 관리들에게도 오늘날과 같은 퇴직 연령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는 법적인 강제 정년은 없었으나 70세를 기준으로 한 '치사(致仕)'라는 명예로운 은퇴 제도가 존재했다.

▶조선의 은퇴, 법적 강제보다 '명예와 예우' 우선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법전에 명시된 엄격한 '만 나이 정년'은 없었다. 하지만 관례적으로 60세가 넘으면 퇴직을 권고받거나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치사(致仕)는 70세 이상의 고위 관료가 임금의 허락을 받아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직무를 내려놓는 '사직'이 아니라, 평생 국가에 헌신한 노신하의 공로를 인정해주는 일종의 훈장과 같았다. 치사(致仕)한 관료는 출근 의무는 없으나 녹봉(급여)을 계속 지급받는 등 특별 대우(잉령치사, 仍令致仕)를 받았다. 왕은 연로한 신하에게 궤장(几杖,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하며 그 공로를 기리기도 했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 70세까지 재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다수 문·무관은 60세 전후가 되면 스스로 물러나거나 퇴직을 권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선조 때 송순의 영정(위의 좌측), 면앙집(위의우측), 담양 면앙정 전경(아래)


송순(宋純)의 연시조 '치사가(致仕歌)'에는 77세에 고향 담양으로 돌아가려던 노신하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몸은 가도 마음은 임금 곁에 있겠다"는 절절한 충정을 노래하기도 했다. 조선의 은퇴는 이처럼 왕과 신하 사이의 신뢰와 노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결합된 형태였다.

▲ 송순(宋純)의 '치사가(致仕歌)'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이 님을 버리옵고 어디로 가잔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먼저 가리라.(老去兮欲退去 與心兮相議 云有吾主兮 欲去兮何地 自持兮佳容 而獨胡為 兮將之)

세계 주요국의 정년제도 현황

▶ 현대의 정년, '명예'보다는 '효율과 생존'의 문제로

현대의 정년 제도는 조선의 치사(致仕)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예우보다는 노동 시장의 효율성과 세대 간 일자리 배분이라는 사회 구조적 목적이 강하다. 현재 대한민국 법정 정년은 만 60세다. 조선 시대가 관례와 왕의 재량에 의존했다면, 현대는 정해진 연령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퇴직 효력이 발생하는 법적 의무 절차다. 개인별 녹봉 지급 대신, 국민연금, 공무원 연금이나 퇴직금 등 제도화된 사회보장 시스템이 은퇴 후 삶을 지탱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정년 제도의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의 화두는 단연 '정년 연장'이다. 2033년까지 국민연금 수급 연령이 65세로 늦춰짐에 따라, 퇴직 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의 '소득 크레바스(Income Crevasse, 소득 절벽)'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현행 60세인 정년을 65세로 단계적으로 높이는 방안이 긴박하게 논의 중이다. 노동계는 '임금 삭감 없는 연장'을, 경영계는 '퇴직 후 재고용(계속고용)' 방식을 선호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또한 정년 연장이 장년층의 일자리는 지켜주지만, 신규 채용 여력을 줄여 청년층의 취업난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기아오토랜드 정년퇴직자들의 호주 퇴직여행 모습

조선시대의 '치사'가 노신하의 명예를 지켜주는 국가적 예우였다면, 현대의 정년 연장 논의는 초고령사회에서 인적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조선의 치사 제도가 노년의 존엄을 지켜주었던 것처럼, 현대의 정년 연장 역시 세대 간의 일자리 갈등을 최소화하고 숙련된 인력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관직과 일터에서 물러나는 일은 개인의 인생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과제였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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