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 현충사, 소유자 최순선


세인들은 대부분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인간의 일은 좋든 나쁘든 반드시 겪어야 하는 운명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남다른 지혜가 있는 이는 먼저 보이는 현상을 미루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그 현상이란, 어떤 일이 발생할 때 나타나는 전조 징후이다. 『주역(周易)』「곤괘(坤卦)」에 “서리를 밟으면 장차 단단한 얼음이 언다[履霜堅氷至]”고 한 것처럼 작은 징후로 큰일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 전략가들은 대부분 남다른 지혜로 전쟁을 예견하고 철저히 대비하였다.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은 “군자는 미세한 것을 보고 큰일을 감지하여 파악하므로,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편의십육책』) 편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작은 징후를 보고 큰일을 대비하므로 큰 재앙을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보이지 않은 일을 미리 예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물의 이치를 두루 깨달을 수 있는 남다른 수양이 필요하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에 대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밝혀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開物成務]”라고 정의하였는데, 이에 대해 송나라 때 학자 장재(張載)는 “사물을 세심하게 살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완성할 수 있고, 그러면 필시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고 풀이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살펴 의문을 해결하는 데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쓸만큼 매우 자상한 성격을 지닌 장수였다. 그날그날의 날짜와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진영을 오고간 인물들의 이름을 낱낱이 적었다. 특히 한산도에 머문 기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역할을 다하고자 자급책을 마련하기 위해 불모지의 섬에서 염전, 어로, 도공예 등의 일을 경영하였다. 또한 매일 소식(小食)하고 갑옷을 벗지 않고 설 잠을 자며 불철주야로 연일 사색하며 작전을 모의하였다. 이러한 일과가 오래 축적되면서 마침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감통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산도에 작전본부를 두고 삼도수군을 지휘하여 해상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계사년 10월 27일에 이순신은 자신의 생각과 각오를 담은 「진중음(陣中吟)」 시를 지었다.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誓海魚龍動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 盟山草木知

원수를 다 섬멸할 수 있다면 讐夷如盡滅

비록 죽을지라도 마다하지 않으리 雖死不爲辭

위 시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비장한 각오와 한결같은 다짐에 자연의 사물마저도 감응함을 읊은 것이다. 한결같은 염원으로 전쟁에 임하였기에 자신의 마음가짐은 항상 당당하였고, 왜적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충정이 드러나 있다. 이 시에 대해 송시열(宋時烈)은 “송나라 장수 악비(岳飛)가 장준(張浚)에게 보낸 시처럼 충정과 용맹을 담고 있다”고 칭송하였다.(『송자대전』)

이처럼 이순신은 남다른 충정으로 노력을 거듭하여 자연의 사물에 감통할 만큼 앞일에 대한 예지력도 남달라서 예견이 매우 정확하였다. 실제 이순신이 진영에서 매번 적의 침입을 먼저 알아내어 부하들이 항상 그의 신명(神明)함에 탄복했다고 한다. 손무(孫武)가 “적을 이기고 전공을 이루는 것은 먼저 알기 때문이다”(『손자』「용간」)라고 했듯이 전쟁에서는 정확한 예측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실제 이순신의 예견이 적중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오후 4시경 적선 13척이 곧장 아군의 진을 친 곳으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 먼 바다까지 좇아갔지만, 바람과 물결엔 모두 거슬려 배가 갈수 없으므로 벽파진(碧波津)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밤의 경보가 있을 것 같았다. 10시경 과연 적선이 포를 쏘아 밤의 경보를 알리자, 아군의 여러 배들이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먹은 것 같으므로, 다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을 대하여 연달아 포를 쏘니 적의 무리는 저항하지 못했다.

- 『신완역 난중일기교주본』 정유년 9월 7일 -

이순신은 벽파진 해전에서 왜적의 기습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대비했는데, 그 날 밤 예상대로 왜적이 쳐들어 왔다. 이에 이순신이 대포를 발사하여 적들을 모두 격퇴시켰다. 사전에 정확히 적의 동향을 파악했기에 잘 대응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그의 남다른 혜안(慧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순신은 전쟁 중 진영에서 국난을 극복해야한다는 한결같은 염원으로 남다른 수양생활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에 감통하였고, 그 결과 남다른 예지력으로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다. 앞일을 미리 아는 예지력이란 결코 범인이 미칠 수 없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까지 현실초극의 강한 의지와 정성을 다하는 치성(致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불패의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을사년 올해는 이순신이 탄생하신지 8주갑을 맞은 해이다. 을사년은 역사 기록을 보면 기복(起伏)의 기운이 매우 강한 해로 보인다. 을사년을 『주역』으로 보면, 처음에는 곤경에 처한 택수곤(澤水困)괘가 나중에는 군중과 화합하는 택지췌(澤地萃)괘로 변하는 상이다. 송대(宋代)의 최고 주역학자 소강절(邵康節)은 이 괘효에 대해 “명성과 이익에는 나아갈만하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橫逆]에는 물러나야 한다”고 하였다. 각자가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현명하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글 : 노승석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

국가유산청 현충사 전문위원

여해고전연구소장

저서 : 『신완역난중일기교주본』,『쉽게보는 난중일기 완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