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부터 해제 보수공사 중 발견된 진보향교 대성전 상량문은 진보향교 대성전 좌협간 상량도리 안쪽에서 발견되었다. 조선 영조 29(1752)년 중수 상량기와 영조 38(1761)년 이건 상량기와 고종 22(1884)년 이건 상량문 3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상량도리의 바깥면은 연녹색 단청이 칠해져 있고 단청이 없는 안쪽에 3곳에 묵서로 기록되어 있었다.

2003년 이전 보수공사 때 상량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공사를 진행하면서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마멸되어 상량문 내용의 일부가 지워졌으며, 또한 나무가 건조되면서 글자를 쓴 부분이 갈라져 판독이 어렵거나 불가능하여 탈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상량문은 대성전 상량도리 3곳에 일반적으로 목재의 방향과 수직으로 기록하지 않고 나뭇결을 따라 횡서로 3~4칸에 묵서로 기록하였는데 그 기록연대는 다음과 같다.

1번 상량 도리목의 기록연대는 숭정후 건륭십칠년 임신구월 중수개건(崇禎後 乾隆十七年 壬申九月 重修改建)이라고 되어 있으며, 또, 숭정후 갑신 칠십사년 정유 십월칠일 □통덕랑(崇禎後 甲申 七十四年 丁酉 十月七日 □通德郞)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752년(영조 29) 10월 7일과 1884.10.7.(고종 22)의 이건 상량문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중수나 이건 시 새 목재에 옮겨 기록했는지 기존 목재에 덧글로 기록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2번 상량 도리목의 기록연대는 건륭 이십육년 신사 십이월초십일 교궁재어토성동 향축래도동월십구일 훼묘이건우(乾隆 二十六年 辛巳 十二月初十日 校宮在扵土城東 香祝來到同月十九日 毁廟移建于)로 되어 있어, 1761년(영조 38)12월 10일에 이건 상량문을 기록하였으며, 3번 상량 도리목은 기록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진보향교는 조선 태종 4년(1404)에 세워진 후 영조 29년(1752)에 중수하였고 영조 38년 (1762) 광덕산 기슭으로 옮겼다가 고종 19년(1882) 구읍(舊邑. 현 진안리)로 다시 옮겼다가 동왕 23년(1886)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청송군지에 의하면 건물은 출입문인 외삼문,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 책을 보관하던 전사청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사청은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져 없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진보향교가 지역 향교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만큼 지금은 대패로 쓰이지 않는 옛 전통 방식인 자귀로 깎아 만든 대청 바닥 조선 영조조에 쓰인 지 오래된 옛 상량문 등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국가 유산으로 등재가 시급하나 보수에 필요한 예산이 없어 해체 공사를 해 놓고도 내년도 예산을 기다려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진보향교가 목재의 연대측정 등 추가 작업을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이 국가 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도록노력하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정희 전문위원

진보향교 대성전 보고공사 현장

상량문이 발견된 진보향교 대성전 상량도리

진보향교 대성전 상량문

진보향교 대성전 상량문 (글자확대)

문화유산위원 기술회의

진보향교 전교님 등 어르신과 현장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