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대표적 선지식이자 의승군장, 외교사절,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사명당 유정 대선사(1544~1610)의 선필(禪筆)을 통해, 한국 불교의 정수와 K-문화의 원형을 새롭게 조망하는 특별전이 오대산에서 막을 올렸다.
글로벌 갈등과 국내 양극화, 공동체의 분열이 심화되는 지금, 400여 년 전 한 선사의 붓끝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의 맥이 되살아난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1544~1610),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 칼이 아닌 붓으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살린 그의 선필(禪筆)이 오늘날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주지 퇴우 정념스님) 성보박물관(관장 해운스님)은 7월 12일부터 10월 19일까지 특별전 ‘사명당 유정 대선사, 선필(禪筆)로 만나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사명대사의 월정사 중창 435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자리로, 대사의 친필 묵적과 전적류 등 총 52점의 유물을 통해 선과 붓, 호국과 평화, 정신과 실천을 아우른 대사의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조선 불교의 위상을 세운 선승, 월정사의 부흥 주역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직전 폐허가 된 월정사의 중창불사(1587~1590)를 주도하고, 오대산 사고(史庫)의 건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월정사는 그의 원력으로 수행과 신앙, 그리고 국가기록 보존의 성소로 거듭났다.
전시 1부 ‘사명대사의 월정사 중창과 오대산 사고’에서는 대사의 수행자적 면모와 정신세계가 진영(眞影)과 유품들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특히 정면을 바라보는 독특한 ‘은해사 진영’, 초서병풍 배경의 ‘의성 대곡사 진영’, ‘영은사 진영’은 당시 조선 불교의 대표 선승으로서 대사의 위상을 상징한다.
선필(禪筆) 속에 깃든 문인의 품격
사명대사의 글은 당시 문인들조차 감탄할 만큼 높은 예술성과 정신성을 지녔다. 제2부 ‘사명대사 선사의 붓끝, 문인의 향기’에서는 사명대사의 서체와 문풍이 담긴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된다.
밀양시립박물관 소장의 ‘용담취영잡영’은 해서와 초서체가 공존하는 귀중한 유물로, 단정한 필치와 활달한 붓끝이 수행자의 심성과 문인의 품격을 동시에 보여준다.
붓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끌다
사명대사의 선필은 단지 예술을 넘어 역사의 전환점에서 평화를 이끄는 실천의 도구였다. 제3부 ‘사명대사 붓으로 평화를 이끌다’에서는 의승군 총섭이자 외교사절로서 사명대사의 행적과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후 포로 송환과 평화 협상을 위해 일본에 파견된 사명대사의 외교 여정은 ‘봉별사명대사왕일본’ 등 이별의 시판(木版), ‘불심종조달마원각대사’와 일본 고쇼지 소장의 묵적 영인본 등으로 되살아난다. 이는 단지 외교가 아닌 선사적 통찰과 자비의 실천이었다.
시대를 넘어 호흡하는 사명대사의 정신
제4부 ‘시대를 넘어 계승되는 사명대사의 정신’에서는 사명대사의 정신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화적 울림임을 강조한다.
<선가귀감>, <약사유리광본원공덕경> 등 대사의 불경 발문과 함께, 현대 소설 <사명대사> 등 문화콘텐츠를 통해 사명정신의 현대적 계승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12일 개막식에는 이상훈 작가의 소설 <포검비(抱劍悲)>를 원작으로 드라마 제작을 준비 중인 파인원미디어 류호식 대표,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임인식 부회장(풍천임씨중앙종친회부회장), 만월선원 한주 통현스님과 월정사 퇴우(退宇) 정념(正念)주지스님이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며 사명대사의 선필과 호국정신, K-불교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에 주목했다.
“사명대사의 선필, 붓끝에서 K-정신이 살아난다”
이번 전시는 단지 과거의 유산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류문화의 근원으로서 ‘선정과 호국, 서예와 평화’의 융합정신을 다시 일깨우며, K-불교문화의 새로운 화두(話頭)를 제시한다.
붓(평화)으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의 정신은 오늘날 정신문화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K-문화의 뿌리로서, 더 넓은 세대와 국경을 넘어 울림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