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갈래의 큰 물줄기가 만나서 삼랑(三浪)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후포산(뒷기미) 기슭에는 오우진(五友津)이라는 유명한 나루터가 있었고, 이 마을 뒷자락 언덕에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고려 시대의 명승 삼랑루(三郞樓)가 있었다. 이런 전망 좋은 옛터에 자리 잡은 정자가 바로 오우정(五友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이다.

오우정은 조선 초기의 성종〜명종 근간에 효행과 우애로 이름 높은 욱재 민구령(閔九齡), 경재 민구소(閔九韶), 우우정 민구연(閔九淵), 무명당 민구주(閔九疇), 삼매당 민구서(閔九敍) 다섯 형제의 아름다운 효우(孝友)의 향이 깃든 여흥 민씨 재사(齋舍)이다.

이들 민씨 오 형제 모두는 진외종조부(陳外從祖父, 아버지의 외삼촌)이신 점필재(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매계 조위(曺偉), 탁영 김일손(金馹孫)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다. 이들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을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부친이 심한 토사로 빈사(瀕死) 상태일 때에 모든 형제가 일제히 손가락을 끊어 수혈로 회생한 일이 있으며, 모친이 종기로 오래 고생하게 되자 오 형제가 번갈아 농(膿)을 빨아내어 완치되었다고 한다.

오우정

1510년(중종 5)에 맏형인 민구령이 삼랑강(낙동강) 기슭의 삼랑루 옛 자리에 아담한 정자 하나를 짓고는 다섯 형제가 함께 기거(起居)하며 학문을 닦고 효행을 실천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그 평판이 온 고을에 자자(藉藉)하였다. 부친이 오 형제 각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자 “옛날 군자는 8대를 같이 살아도 화목(和睦)하게 지낸 일도 있는데 어찌 우리 형제가 각각 재산을 나눠떨어져 살며 내것 네것을 가리려고 하십니까?" 하며 끝내 재산을 나눠 갖지 않고 평생을 서로 양보하고 근검절약하며 지냈다고 한다.

1547년(명종 2) 당시의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 정여창 외손녀 사위)이 어느 날 밤중에 찾아가 이런 민씨 오 형제의 효우 사실을 확인한 후에 감동한 나머지 조정에 벼슬을 천거하고, 오우정(五友亭)이란 큰 현판을 써주며 치하했다고 한다. 동강 김영한(金寗漢)이 쓴 오우정 이건기(移建記)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오·갑자사화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門徒)가 거의 다 죽임을 당할 때도 민씨 오 형제는 몸을 숨기고 산림에 은둔하여 오우정을 짓고 형제끼리 항상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났으며,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응하지 않고 은거(隱居)하여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1563년(명종 18)에 고을 사람들이 이들 오 형제의 아름다운 효우를 기리기 위해 경내에 오우사(五友祠)를 짓고, 기사비(記事碑, 어떤 사실을 알리는 내용을 새긴 비석)를 세웠다. 그 후에 오우사는 삼강사(三江祠)로 바뀌었다가 삼강서원(三江書院)으로 격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내의 모든 문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1675년(숙종 1) 후손들에 의해 오우정이 중건(重建)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향토 사림의 공론으로 삼강서원이 다시 건립되었고, 1704(숙종 30)에는 오우사 묘우(廟宇)를 중건하였다.

삼강서원 전경

1775년(영조 51)에는 지금의 자리에 좌참찬 정암 민우수(閔愚洙)가 비문을 짓고, 대사헌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쓴 삼강사비(三江祠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가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 밀양의 삼랑강(밀양강) 가에 정자가 있고, 정자로부터 북쪽으로 조금 가면 그 동쪽에 사당이 있다. 이는 향선생(鄕先生) 욱재 민구령, 경재 민구소, 우우정 민구연, 무명당 민구주, 삼매당 민구서 다섯 형제가 화락(和樂) 하게 즐긴 곳으로 훗날 사람들이 그 터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곳이다. 고려 말에 대제학을 지낸 민유(閔愉)가 국정이 문란한 것을 보고 동성의 통진에 퇴거하여 삶을 마쳤으니, 고아한 풍모와 뛰어난 절조(節操)를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고 흠모하였다. 우리 조정에서 이조 참의를 지낸 민근(閔謹)이 바로 그 증손이다. 참의공이 성주(星州)를 다스릴 때 강호 김숙자(金叔滋)가 밀양에 거주하였는데, 두 집안이 혼사를 맺기로 약속하여 공의 아들 제(除)가 강호(江湖)의 사위가 되었는데, 겨우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인 경(熲)이 있었으니 진사(進士)이고, 경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어질었다. 어려서부터 강호의 아들 점필재 문하에서 노닐어 학문과 덕행으로 칭찬이 자자했으니 친상(親喪)을 치름에 슬픔과 예법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으니 한 정자에서 함께 거처하고는 그 정자를 ‘오우(五友)’라 편액하고 ‘척령가(鶺鴒歌, 할미새 노래)’를 지어 서로 화답하고, 봄가을에는 거의 30명이나 되는 여러 자식과 손주들을 데리고 정자에서 소요하며 종일토록 즐거워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들러서 보고 밤중에 다시 그곳에 느닷없이 이르렀는데 5명의 형제가 함께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공경과 감탄이 깊어져서 이들의 돈독한 우애를 조정에 알렸다.

이로 인해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켜 관리로서 영남에 온 자들은 모두 시(詩)를 지어 찬미하였으니 진실로 한 시대의 훌륭한 일이다.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떠나니, 1563(명종 18)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올렸다. 이로부터 읍재(邑宰, 수령)가 된 자는 반드시 오우정을 방문하여 회상하며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일으켰고, 그중 어떤 읍재는 오우(五友)로 제목을 삼아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같아서이다. 공들의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대부분 밀양에 거주해 왔는데, 지금 비록 쇠락하였으나 대개 효성과 우애에 돈독한 것은 역시 공들의 유풍이다.

사당과 정자는 여러 차례 세워지고 퇴락하는 속에서도 인사(人士)들이 수리하고 관리하여 끝내 무너지지 않게 하였으나, 유문(遺文)이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으니 아, 애석하다. 내가 전에 남쪽 지방을 유람했을 때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띄워서 삼강사(三江祠)를 참배하고 오우정에 올라 강산의 빼어남을 감상하고 서성이면서 감개무량하여 오래도록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은 나 역시 대제학의 후손으로 공들과는 동종(同宗)의 친척이고, 세교(世敎, 세상의 가르침)가 쇠미하여 백성들이 마음을 일으켜 실행하지 않으니, 공들과 같은 자를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자 옆에 옛날에 기사비(記事碑)가 있었는데, 임진병란 때 무너져서 공의 6대손 우사(友賜) 및 7대손 함수(涵洙)와 광수(光洙) 등이 지금 보수하여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그 돌에 새길 비문을 써서 후대에 남길 것을 부탁하니,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대략 이처럼 쓴다.」

오우선생 약전비

삼강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7년(고종 34)에 후손인 영지(泳智)‧영하(泳夏) 등이 문중과 의논하여 서원을 중건하였다. 1979년에는 14세손 병태(丙兌)의 주선으로 후손들이 협력하여 경내 건물을 확충하고 사당을 다시 짓고는 향내 유림의 공의(公議)로 삼강서원 현판을 걸어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나 형제간의 우애(友愛)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은 인간사의 아름답고 존귀한 가치이다. 세상이 점점 부모도 형제도 모르고 살아가는 개인주의적 삶이 팽배해지고 있다. 아름다운 효우(孝友)의 향이 깃든 오우정이야말로 요즘 같은 이기적 세태(世態)에서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부모와 형제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좋은 기회의 장(場)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