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군락지인 영광 불갑사(佛甲寺)와 함평 용천사(龍泉寺)일대를 붉게 수놓은 꽃무릇의 전경(사진제공 김일권, 조병필)


가을의 문턱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붉은 물결이 있다. 바로 꽃무릇이다. 이 강렬한 꽃은 흔히 상사화(相思花)로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 둘은 잎과 꽃이 평생 서로를 볼 수 없는 '상사(相思)'의 운명을 공유할 뿐, 엄연히 다른 꽃이다. 혼동하기 쉬운 두 꽃, 상사화와 꽃무릇에 얽힌 애틋한 이야기와 그 차이점을 짚어본다.

호젓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함평 용천사(龍泉寺) 주변의 꽃무릇 전경 1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운명 다른 이름 상사화와 꽃무릇
상사화와 꽃무릇(석산, 石蒜)은 둘 다 수선화과(Amaryllidaceae)에 속하며,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피지 않는 독특한 생육 주기를 가진다. 그래서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상사화(相思花)라는 애절한 이름이 붙었다. 이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운명이 두 꽃을 묶어주는 공통분모이자,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별개의 종이다. 상사화 (相思花, Lycoris squamigera)는 7~8월 여름에 연분홍, 연보라 등 부드러운 색감을 띠고, 꽃잎이 넓고 나팔처럼 벌어지며, 잎이 먼저 자란 뒤 꽃이 피는 순서를 가진다. 이와 다르게 꽃무릇(석산, Lycoris radiata)은 개화 시기가 9월에서 10월 초가을에 강렬한 붉은색으로 꽃잎이 가늘고 길게 뻗어 거미줄 같은 실루엣의 꽃이 먼저 피고 진 후에야 잎이 나오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처럼 상사화와 꽃무릇은 비슷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개화 시기, 꽃색, 잎의 순서 등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 계절과 꽃의 특징을 기준으로 구분하시면 좋을것 같다. 따라서 9월 중순, 사찰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꽃은 학술적으로는 꽃무릇이 맞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영광 불갑사(佛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 등 남부 지방 사찰 주변에 대규모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는 것도 바로 이 꽃무릇이다.

꽃무릇과 상사화의 뿌리와 잎의 비교(사진제공 네이버검색)


◾️ '붉은 융단'의 압도적인 장관, 꽃무릇
특히 가을에 만나는 꽃무릇은 그 존재감이 매우 강렬하다. 꽃잎이 길고 가늘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진홍색 군락은 사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영광 불갑사,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등이 전국적인 명소로 손꼽힌다.
꽃무릇이 사찰 주변에 많은 데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꽃무릇의 알뿌리(구근)에서 나오는 전분을 풀로 쑤어 불교 경전을 만들거나 탱화를 그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이 풀을 사용하면 좀이 슬지 않고 그림이 오래 보존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꽃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사찰에 유용한 식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최대 군락지인 영광 불갑사(佛甲寺)일대를 붉게 수놓으며 장관을 연출하는 꽃무릇의 전경 1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슬픈 운명
상사화와 꽃무릇을 아우르는 가장 큰 특징은 '꽃은 잎이 없을 때 피고, 잎은 꽃이 없을 때 자란다'는 점이다.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처럼, 이들은 한 몸이면서도 평생 서로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상사화(相思花), 즉 '서로를 생각하는 꽃'이다. 꽃이 질 때쯤 잎이 나고, 잎이 질 때쯤 꽃이 피는 기막힌 엇갈림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움', '슬픈 추억' 등의 애절한 꽃말로 이어지며 많은 문학 작품과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사찰 주변에 군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 불교적인 전설과도 엮여 '죽어서 만나는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슬픈 엇갈림의 세상에, 차나무는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나무'라는 뜻의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나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대부분의 나무가 꽃과 열매가 시차를 두고 만나는 것과 달리, 차나무는 가을 혹은 초겨울(10월~11월)에 꽃을 피워 다음 해 겨울이나 봄에 열매를 맺는다. 1년 전에 꽃이 열매가 되어 1년 후의 꽃을 맞는 것이 조상이 후손을 다정하게 맞는다하여 차나무를 화목의 나무라고도 한다. 이렇듯 꽃과 열매가 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기어이 서로 마주하는 이 모습은, 마치 상사화와 꽃무릇이 평생을 그리움으로 보내는 것과는 대조되는 '이루어지는 사랑'의 축복처럼 느껴진다.

호젓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함평 용천사(龍泉寺) 주변의 꽃무릇 전경 2

국내 최대 군락지인 영광 불갑사(佛甲寺)일대를 붉게 수놓으며 장관을 연출하는 꽃무릇의 전경 2


꽃과 잎이 평생 만나지 못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이 애틋한 꽃은, 9월 중순 무렵부터 국내 최대 군락지인 영광 불갑사(佛甲寺)와 함평 용천사(龍泉寺) 일대를 붉게 수놓으며 장관을 연출한다. 지척에 자리한 두 사찰이 품은 꽃무릇 밭은 수십만 평에 이르러,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풍경을 선사한다. 불갑사가 축제의 활기로 가득하다면, 용천사는 호젓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찰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짙은 녹음 아래 선홍빛 꽃무릇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가을 여행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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