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장 일옹 최희량 장군의 영정과 임란첩보서목(사진제공 최대원, 네이버검색, AI활용)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고통에 몰아넣었지만,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을 비롯한 많은 영웅들의 활약은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오늘은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업적을 남긴 한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본다. 바로 무숙공(武肅公) 최희량(崔希亮) 장군이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명량(鳴梁), 첨산(尖山), 왜교성(倭橋城)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는 충절을 보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호를 딴 일옹문집(逸翁文集)과 최일옹파왜보첩(崔逸翁破倭譜牒)이 전해지며, 나주 무숙사(武肅祠)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지금부터 이 위대한 영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의 존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전투로 평가받고 있는 명량해전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고 충무공께서 적의 탄환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던 최후 해전

▶ 최희량(崔希亮, 1560~1651)

자(字)는경명(景明), 호(號)는 일옹(逸翁), 본관은 수성(隋城, 현재의 수원)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깊었으며 율정(栗亭)최학령(崔鶴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 경서와 사기를 아우르는 말)에 매우 밝았다. 1592년(선조 25)에 왜란이 일어났으나 부친상(父親喪) 중이라 여막(廬幕)에 있었으며,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해 겨울에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있는 장인 이계정(李繼鄭, 1542~1595)의 비장(裨將)이 되어 장인과 함께 수군을 통솔하였고, 이듬해에 추천되어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에 왜구가 재차 쳐들어오자 선조(宣祖)가 왜적 우두머리 풍신수길(豐臣秀吉,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초상을 걸어두고 여러 무신에게 활을 쏘라고 명했다. 공이 그 이마를 적중시키니 선조(宣祖)가 크게 기뻐하면서 특별히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임명하였다.

흥양(현, 고흥)현 읍성의 사진(위), 임진왜란기 남해안과 흥양(고흥)의 주요 전투 지도(아래) - 국립나주박물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사진 제공

당시 조정에서는 연해(沿海, 바닷가 인접 지역) 수령에게 명을 내려 모두 수군에 소속시키자 공(公)은 즉시 이충무공(李忠武公) 통제사(統制使) 휘하로 들어갔다. 전투마다 용맹을 뽐내면서 선봉이 되어, 13척의 수군으로 바다를 뒤덮은 적과 맞닥뜨렸는데 명량(鳴梁)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고, 첨산(尖山, 고흥군 대강면에 있는 산)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고, 왜교성(倭橋城, 순천왜성)에서 세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또 기이한 계책을 내어 밤에 적진을 습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나서 그들의 곡식 5백여 섬을 취하여 군량미로 사용하여 먹었다. 당시 충무공이 참소(譖訴,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를 당해 직위 해제되었으므로 공(公)은 고을에 있으면서도 상처투성이의 병졸을 앞장서서 이끌고 전함을 만들고 무기를 수선하고 직접 나무도 끌어오면서 동고동락하였다. 이듬해 1598년(선조 31)에 충무공(忠武公)이 다시 수군을 거느릴 때 특별히 공(公)의 공로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봄에서 가을까지 양강(楊江)과 고도(姑島)와 고을 남문의 남당포(南堂浦)에서 연전연승하여 전후로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 온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 포로로 잡힌 사람 신덕희(申德熙)와 7백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혔으나 적을 설득하여 그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공로를 올린 서첩이 지금도 전해진다.

고흥군 대강면에 있는 첨산전투 상황도(위)와 최희량장군의 주요 활동지역(아래)

삼선생유허비(이순신, 최희량, 정여린), 최희량장군 신도비, 무숙공 최희량장군 묘정비, 최희량장군 부부 합장묘소 전경

당시 전라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은 통제사(統制使)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이 오직 충무공(忠武公)의 지휘를 받는 것을 미워하여 거짓을 보고해서 파직을 청하자 처음에는 임금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여섯 차례나 보고하자 비로소 교체를 허락하셨다. 공(公)은 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통제사 막하에 머물면서 군사 작전을 도왔다. 11월에 충무공이 수군을 대규모로 모아 노량(露梁)에서 격전을 벌여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고 남해까지 추격하였다. 적은 크게 기세가 꺾여 달아났으나 충무공(忠武公)은 적의 탄환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이러한 비통함 속에서 공(公)은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향했던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충무공(忠武公)은 단순한 상관을 넘어 나라를 구할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그런 충무공(忠武公)이 자신의 눈앞에서 전사했으니, 그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또한 오랜 전쟁 속에서 수많은 희생과 부패한 관료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충무공(忠武公)조차 무고한 탄핵을 받았던 역사를 보며, 더 이상 조정에 대한 기대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심경 속에서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금강(錦江, 영산강을 금강이라고도 함)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백호(白湖) 임제(林悌), 한호(閑好) 임련(林堜),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등 여러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소요(逍遙)하다가 생을 마쳤다. 1605년(선조 38)에 조정에서 논공행상할 때 공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錄勳)되었고, 공이 돌아가신 후 124년이 되는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공은 평소 겸손함을 지켜서 스스로 자부하거나 자랑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의 활약상은 보물 제660호인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 - 첩보서목(崔希亮 壬亂關聯 古文書 - 捷報書目)'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업적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료로 증명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선조실록(宣祖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강재집(剛齋集, 정재현의 시문집),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 다양한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어 그의 활약상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1984년 건립된 최희량 장군의 사우(祠宇)인 무숙사의 전경들...

선조수정실록, 강재집, 이충무공전서, 호남절의록 등 다양한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어 최희량 장군의 관련 역사서...


최희량(崔希亮) 장군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임진왜란 속에서 빛났던 수많은 무명의 영웅들이 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활약은 오늘날까지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나라를 위한 헌신과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그들의 강인한 의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것이다.

🔳 참고문헌

1. 박중환, [호남의 임진왜란, 그 승리의 기록], 국립나주박물관, 2018.

2. 윤병태, [나주의병사, 조선시대 나주의병], 나주시, 2022.

3. 신동운,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최희량(崔希亮) 장군], 나주토픽, 2023.

4. 노기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판본고(板本考)], 호남학연구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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