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수성최씨 5형제 모습을 AI로 표현하고, 5형제의 활약상이 수록된 호남절의록 표지(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유튜브 동영상 캡쳐, AI프로그램 이용)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같은 이름들을 떠올린다. 불멸의 제독 이순신(李舜臣), 행주산성의 영웅 권율(權慄), 의병의 상징 김천일(金千鎰),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의 아들인 기효증(奇孝曾) 의병장 등 이들은 분명히 시대의 등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빛나는 공적 뒤에는 조용히, 그러나 굳건히 나라를 지킨 수많은 휘하 장수들과 무명 의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주 수성최씨(隋城崔氏) 5형제는 한 집안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기 드문 충절은 이제라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빛나는 한 집안 다섯 형제의 충의(忠義)
첫째 최희열(崔希說, 1536~1607)은 권율 장군(權慄 將軍)의 휘하에서 금산 이치대첩(梨峙大捷)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 전투는 왜군의 진격을 저지한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으며, 최희열(崔希說)의 용맹과 지휘는 당시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최희윤(崔希尹, 1539~1610)은 기효증(奇孝曾) 의병장(義兵將)을 도와 의곡을 모아 행재소(行在所, 왕이 피란 중 머무는 곳)로 수송하는 한편, 영광읍성(靈光邑城)을 지켜내며 후방 방어를 책임졌으니, 단지 총과 칼이 아닌 군량과 지원으로 싸운 이들 또한 전장의 숨은 주역이었다.
첫째 최희열은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금산 이치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움.
둘째 최희윤은 기효증 의병장을 도와 의곡을 모아 행재 소로 수송하는 한편, 영광읍성을 방어함.
셋째 최희급(崔希伋)과 넷째 최희민(崔希閔, 1551~1623) 형제는 수십 명의 가동(家僮, 한집안에 매인 종을 이르던 말)을 이끌고 김천일(金千鎰) 의병장(義兵將) 휘하에 가담하여 강화도(江華島)와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 참여했다. 진주성(晉州城)은 수많은 의병과 백성이 끝까지 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상징적인 전투였다. 이 형제의 이름은 비록 전공을 독점하지 않았지만, 그 피와 희생은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그리고 막내 최희량(崔希亮, 1560~1651)은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흥양(興陽, 고흥) 현감(縣監)으로 조선이 낳은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 휘하에 들어갔다. 명도(鳴島), 첨산(尖山), 예교(曳橋, 전라남도 순천 망해대의 옛 이름)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 훗날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바다 위에서 조국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셋째 최희급과 넷째 최희민 형제는 김천일 의병장 휘하에 가담하여 진주성전투에 참여하여 최희급은 순절함.
다섯째 최희량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 휘하에 들어가 명도, 첨산, 예교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함.
이처럼 나주 수성최씨 5형제는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지휘관 아래에서 싸웠으며, 전쟁의 여러 국면의 전투, 보급, 수성, 해전 등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한 집안에서 최씨 5형제처럼 나라를 지킨 가문이 몇이나 있겠는가? 다섯 형제가 각기 다른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충의는 역사 속에서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 참고문헌
1. 윤병태, [나주의병사, 조선시대 나주의병], 나주시, 2022.
2. 신동운,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최희량(崔希亮) 장군], 나주토픽,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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