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열은 1598년 순천 왜교성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고 양식을 조달했으며, 둘째 최희윤은 기효증 의병장을 도와 의곡을 모아 행재소로 수송했던 형제를 상상해서 AI기술로 만든 사진
【광주광역시=헤리티지뉴스】임진왜란(壬辰倭亂)의 혹독한 전란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호남의 의로운 가문, 수성최씨(隋城崔氏, 수원) 가문의 4대손 최낙궁(崔樂窮)의 아들인 최희열(崔希說), 최희윤(崔希胤), 최희급(崔希伋), 최희민(崔希閔), 최희량(崔希亮) 다섯 형제는 각기 의병과 수군, 관군에 참여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고, 이들의 활약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빛나는 기록으로 남았다. 여기에서는 최희열(崔希說)과 최희윤(崔希胤) 형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호남절의록에 빛나는 다섯 형제 중 첫째, 둘째의 활약상
최낙궁(崔樂窮)의 다섯 아들은 임진왜란 발발 후 각기 다른 전선에서, 혹은 의병 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그중에서 첫째 최희열(崔希說)은 순천 왜교성 전투에 의병을 모집하고 양식을 조달하여 간접적으로 전투를 도왔고, 둘째 최희윤(崔希胤)은 기효증(奇孝曾, 1550~1616) 의병장을 도와 의곡을 모아 행재소로 수송하며 영광읍성을 지켰다.
1598년 조명연합 군과 일본군이 격전한 전투인 왜교성 전투를 상상해서 AI기술로 그린 모습(위의 좌우)과 왜교성 전투를 그린 정왜기공도권의 그림(아래, 네이버 검색 사진)
◾️ 최희열(崔希說, 1536~1607)
최희열(崔希說)은 자(字)는 경뢰(景賚), 호(號)는 삼주(三洲), 본관은 수성(隋城), 봉암(鳳巖) 원개(元凱, 초명은 사위)의 후손이고 승지(承旨) 낙궁(樂窮)의 첫째 아들이다. 율정(栗亭)최학령(崔鶴齡)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선조6년(157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선조15년(1582)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과 병조좌랑(兵曹佐郎), 예조좌랑(禮曹佐郎), 진원현감(珍源縣監,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을 지냈으며,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당시 조정(朝廷)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파벌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공의 내외종 (內外從)관계였던 당시 이조판서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공에게 함께 일할 것을 청했다. 하지만 공은 "지금 조정이 나뉘어 서로를 헐뜯기 바쁜데, 나를 자기 파벌의 사냥개처럼 이용하려는 것인가?"라고 일갈하며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같은 마을의 남호(南湖) 유은(柳溵, 1540~1590)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자취를 숨기고, 마을의 일곱 사람과 더불어 보산(寶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마음 가는 대로 소요하였다.
나주 보산정사는 조선 중종때부터 선조 때까지 보산팔 현이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에 힘쓴 문화공간으로 보산팔현으로 죽담 이유근, 야우 장이길, 창주 정상, 한천 유주 , 삼주 최희열, 금애 이언상, 남호 유은, 사촌 최사물 등은 모신 산사 사당(위의 좌), 보산정사의 현판(위의 우)과 보산정사 전경(아래)
임진왜란 때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 가자 공은 진사 양산룡(梁山龍), 좌랑 양산숙(梁山璹), 습정(習靜) 임환(林懽), 정랑 정심(鄭諶) 등 여러 사람과 의병을 모으고, 또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1529~1595)과 함께 소(疏)를 올려 호남은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원지) 이므로 이곳으로 행재소(行在所)를 옮겨 난을 극복 할 근본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요청했다. 무술년(1598, 선조 31) 왜교성 전투 당시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순천부(順天府)에서 도내의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계획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공은 창주(滄洲) 정상(鄭詳), 송정(松亭) 장이경(張以慶), 반환(盤桓) 홍천경(洪千璟)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양식을 조달하여 군사력을 도왔다. 이처럼 공은 당시 나이가 62세 고령이라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권율(權慄)의 전투를 도왔기 때문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권율을 도운 인물로 거론되었다. 계묘년(1603, 선조 36)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지나치게 슬퍼하여 병이 생겼다. 탈상을 마치자마자 정미년(1607, 선조 40) 정월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72세였고, 나주 보산정사(寶山精舍)에 배향되어 있다. 공은 학문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벼슬자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시국을 살펴 명예나 이익에 욕심을 두지 않고 은퇴하였으니, 굳건히 지조를 지켰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더욱더 공을 알 수 있다.
임진란때 의곡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에게 부쳐 조운으로 행재소와 광주 의병소로 수송하는 모습을 AI기술로 재현한 모습들...
◾️ 최희윤(崔希尹, 1539~1610)
최희윤(崔希尹)은 자는 경임(景任),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수성(隋城), 봉암(鳳巖) 원개(元凱, 초명은 사위)의 후손이고 승지(承旨) 낙궁(樂窮)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란때 전참봉(前參奉) 이굉중(李宏中)과 함께 의곡(義穀)을 모아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에게 부쳐 조운으로 행재소(行在所, 왕이 피란 중 머무는 곳)와 광주 의병소(光州 義兵所)로 수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생원(生員) 이응종(李應鍾) 등 54인과 함께 영광읍성(靈光邑城)을 굳건히 지켜냈다. 화려한 전공보다는 묵묵히 군수지원에 힘쓴 그의 행적은 충의사록(忠義士錄)에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지역선비들이 영광읍성을 지킨 선비들의 모습을 AI로 재현 사진(위의 좌)과 그들을 추모하는 임진수성사(위의 우), 1910년대 영광읍성 남쪽의 망원루와 홍문의 전경(아래)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나라를 지킨 수많은 영웅 중에는 잘 알려진 위인들 외에도 조용히 헌신한 무명의 인물들이 많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수성최씨(隋城崔氏) 5형제와 같은 이들의 헌신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서는 안 될 진정한 영웅들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처럼 묵묵히 나라를 위해 희생한 무명의 영웅들을 기억해야 한다. 수성최씨(隋城崔氏) 5형제와 같은 이들의 헌신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기억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임진왜란 역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윤병태, [나주의병사, 조선시대 나주의병], 나주시, 2022.
2. 김희태, [나주 보산정사의 역사와 인물, 자료(연표)], 네이버블로그 '향토학인', 2023.
3. 노기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판본고(板本考)], 호남학연구원, 2025.
4. 최윤희, [수성최씨 대종회], 수성최씨 대종회 역사 자료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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