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최희급과 넷째 최희민 형제는 김천일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와 진주성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군량미 운송에 책임을 맡은 운량장으로 '조선의 소하'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던 내용들을 AI를 활용한 그림으로 표현한 모습들...

나주 수성최씨(隋城崔氏, 수원) 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혹한 전란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호남의 의로운 가문이다. 특히 중시조 최순(崔淳)의 4대손인 최낙궁(崔樂窮)의 다섯 아들, 최희열(崔希說), 최희윤(崔希胤), 최희급(崔希伋), 최희민(崔希閔), 최희량(崔希亮) 형제는 각기 의병과 수군, 관군에 참여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고, 이들의 활약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빛나는 기록으로 당당히 남았다. 여기에서는 최희급(崔希伋)과 최희민(崔希閔) 형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호남 의병장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서예원 등의 의병들의 전투장면


▶ 호남절의록에 빛나는 다섯 형제 중셋째, 넷째의 활약상

최낙궁(崔樂窮)의 다섯 아들은 임진왜란 발발 후 각기 다른 전선에서, 혹은 의병 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그중에서 셋째 최희급과 넷째 최희민 형제는 가동 수십 명을 이끌고 김천일 의병장(金千鎰 義兵將)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와 진주성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조선의 소하(蕭何, 전쟁에서 인사관리와 보급의 중요성을 입증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최희급(崔希伋)은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촉석루 아래에서 순절하여 호남의 의로운 정신을 보여주었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의 호국사(護國祠)에 김천일(金千鎰) 의병장과 함께 배향되었다. 동생 최희민(崔希閔)은 형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충의사록, 호남절의록)

임진란때 가동 수십 명을 이끌고 김천일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군량미를 총괄하는 운량장을 맡아 아우인 희민을 시켜 바닷길로 운송을 하였고, 진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됨에 김천일 의병장과 함께 촉석루 아래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모습들을 AI를 활용한 모습들을 재현함

◼️최희급(崔希伋)

최희급(崔希伋)의 자(字)는 경사(景思), 호(號)는 청재(淸齋), 본관은 수성(隋城), 봉암(鳳巖) 원개(元凱, 초명은 사위)의 후손이고 승지(承旨) 낙궁(樂窮)의 셋째 아들이다. 조선조(朝鮮朝)에 장사랑(將士郞, 종구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에 이르렀다. 문장이 일찍 트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믿음직하고 착실하였다.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의 문하에 종유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여 세상에서 높이 평가 받았다.

임진란때 백의(白衣,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표현)로서 가동(家僮, 한집안에 매인 종을 이르던 말) 수십 명을 이끌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회맹(會盟)에 거의(擧義)에 참여하여 함께 강화도에 들어갔다. 김천일 의병장(金千鎰 義兵將)이 운량장(運粮將)을 맡기니 공은 아우인 희민(希閔)을 시켜 바닷길로의 운송이 끊어짐이 없도록 하였다. 김천일 의병장(金千鎰 義兵將)이 칭찬하여 이르길 '조선의 소하(蕭何, 전쟁에서 인사관리와 보급의 중요성을 입증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라 하였다. 진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됨에 김천일 의병장(金千鎰 義兵將)과 함께 촉석루(矗石樓) 아래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세 아들 최진(崔縉)‧최연(崔練)‧최선(崔繕)도 왜적의 손에 죽었다. 큰형인 희열(希說)·둘째형 희윤(希尹)·아래동생 희량(希亮) 등도 창의하였고, 조카인 원(綩)은 순절하였다. 또한 결(結)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때 인조(仁祖, 1636)를 호가(扈駕,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는 일)하였고, 손자인 인현(仁峴)은 이괄의 난(1624)때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다.

군랑미운송 총괄을 맡은 운량장 형 희급과 함께 바닷길로 군량미를 운송한 모습들을 AI가 재해석한 대규모 군량미 운송 장면

◼️최희민(崔希閔, 1551~1623)

최희민(崔希閔)의 자(字)는 경은(景誾), 호(號)는 학곡(鶴谷), 본관은 수성(隋城), 봉암(鳳巖) 원개(元凱, 초명은 사위)의 후손이고 승지(承旨) 낙궁(樂窮)의 넷째 아들이다. 조선조(朝鮮朝)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냈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임진란때 형 희급(希伋)과 더불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의병장(金千鎰 義兵將)의 막하에서 군량미(軍糧米) 운송에 끊어짐이 없게 하였는데, 그러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자 형인 희급(希伋)이 촉석루 아래에서 순절하자, 희민(希閔)은 그저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깊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최희민(崔希閔)은 비록 역사의 전면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지 모르나, 위기의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지킨 참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섯 형제들이 임진왜란 때에 각기 다른 전선에서, 혹은 의병 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했던 내용들이 충의사록, 호남절의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킨 수많은 영웅 중에는 잘 알려진 위인들 외에도 조용히 헌신한 무명의 인물들이 많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수성최씨 5형제와 같은 이들의 헌신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서는 안 될 진정한 영웅들이다.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장수들과 고경명, 김천일 등과 같은 의병장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빛나는 활약은 나라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위대한 공적들은 그들의 휘하에서 묵묵히 싸운 수많은 병사들과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선 의병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이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나라를 지탱한 진정한 뿌리였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처럼 묵묵히 나라를 위해 희생한 무명의 영웅들을 기억해야 한다. 수성최씨 5형제와 같은 이들의 헌신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기억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임진왜란 역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윤병태, [나주의병사, 조선시대 나주의병], 나주시, 2022.

2. 노기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판본고(板本考)], 호남학연구원, 2025.

3. 최윤희, [수성최씨 대종회], 수성최씨 대종회 역사 자료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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