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관장 김지연) 백제학연구소는 10월 25일(금) 제25회 쟁점백제사 학술회의를 한성백제홀에서 개최했다. 이번 학술회의의 주제는 "백제 고분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로, 지금까지의 한성기에서 사비기에 이르는 백제 고분에 대한 조사·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현 단계에서의 백제 고분 연구의 쟁점사항 등을 집중조명했다.
토론 세션 전경
주제 발표에 앞서 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기조 강연으로 백제 고분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를 소개했다. 그가 뽑은 쟁점은 10가지로서, ①고분으로 백제 건국의 시점과 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가 ②고구려 고유 묘제인 적석총이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된 이유 ③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이 왕권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것인지의 여부 ④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전래, 피장자, 그 의미 ⑤웅진 천도 후 적석총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 왕릉 묘제가 바뀐 연유 ⑥소위 '방형' 및 '장방형' 횡혈식 석실분의 의미 ⑦웅진기 중국식 전실분 왕릉 등장의 의미 ⑧사비기 단면 방형석실의 등장 시기와 계통 문제 ⑨지방의 횡혈식 석실 군집분의 형성 시기 ⑩익산 쌍릉의 피장자 문제가 해당한다.
이어 ▲'백제 적석총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 (이동희, 인제대) ▲'한성기 석실묘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임영재,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 ▲'웅진기 고분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장재원,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사비기 고분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서현주, 한국전통문화대)에서 시대별 백제 고분의 주요 쟁점 사항을 다루었다.
◇ 백제 적석총
백제 적석총을 발표한 이동희 인제대 교수는 서울 석촌동 적석총의 출현에 대한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본인은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계 적석총 축조 세력의 남하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발표하였다. 임진강 유역에는 그 밀집도가 높을 뿐더러 개성 장학리 고분과 같은 계단식 적석총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임진강 유역에서 주목해야 할 유적은 오늘 학술회의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연천 삼곶리 적석총인데, 이 교수는 이 적석총에 제단 시설이 있었다고 보고, 토론에 참여한 김진영(국립한국교통대)·정치영(한성백제박물관) 박사는 정선 아우라지나 광주 곤지암에서 최근 발굴된 벌집모양(연접식) 적석총일 가능성이 있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발표자 이동희 교수는 막상 삼곶리 고분에서 확인된 매장 주체부(묘곽)의 바닥은 맨바닥이라며, 제단 시설로 보이는 돌기단이 다른 묘곽일 가능성을 일축했다.
덧붙여 그는 경기 북부지역 주민 및 군관계자들의 제보에 따르면 휴전선 부근에 여러 기의 적석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일제강점기 때에만 해도 60여 기가 확인되던 한강 이남의 적석총을 고려한다면, 더 넓은 범위에서 적석총에 대한 정밀한 학술조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백제 적석총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 (이동희 인제대 교수 발표)
◇ 백제 횡혈식 석실묘
횡혈식 석실묘는 고분의 측면에 입구를 낸 돌방무덤을 말하며, 개폐가 가능하므로 추가장이 용이한 특징이 있다. 횡혈식 석실묘는 중국의 전실묘(벽돌묘)에서 유래되어 전역으로 확산하여 점차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주류가 된 무덤 양식이다. 백제의 횡혈식 석실묘는 한성기에 출현하기 시작하며 사비기에 이르면 백제 전역에서 축조된다.
한성기 석실묘를 발표한 임영재 박사는 한성기 석실묘의 중요한 특징들이 이미 평양 보성리 벽화고분 등 낙랑·대방 지역의 전석혼축묘와 석실묘에서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서북한 지역과 한성기 석실묘의 연속성을 논의하였다.
또한, 무덤의 입구인 묘도의 경사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이 매장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분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경사 묘도에서 수평 묘도로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무덤의 배수로 역시 후기로 갈수록 일반화되는 양상을 확인하였다. 이 점은 낙랑·대방 등 서북한 지역 외에도 중국 남조와의 교류 속에서 유입된 문화적 양상일 것으로 추정했다.
◇ 웅진기 고분
장재원 박사는 횡혈식 석실묘가 지배층의 묘제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웅진기 고분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내 고분 분포 현황과 축조된 순서를 중심으로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발굴이 시작되어 명확한 근거 자료 없이 여러 번 정비·복원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무령왕릉과 왕릉원」(이하 '왕릉원')의 봉분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그는 횡혈식 석실묘 1~4호분이 있는 북동쪽과 무령왕릉과 나머지 고분이 있는 서남부로 구역을 나눈 뒤, 북동부 구역에서는 1호에서 4호 방향, 즉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서남부 구역에는 무령왕릉 외에도 전실분(6호분)이 하나 더 있어 선후관계가 주목되는데, 발표자는 묘도와 배수구의 정황을 토대로 6호분이 무령왕릉에 앞서는 것으로 추정했다. 전체적인 무덤 조영의 순서는 동북부의 횡혈식 석실묘 4기→서남부의 전실묘인 6호분과 무령왕릉→서남부의 5호·29호의 벽돌과 석재가 섞인 횡혈식 석실묘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돌출된 듯 보이는 2기의 전실묘의 도입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이미 기조강연에서 김낙중 교수가 언급한 바다. 여기에 대하여 발표자는 무령왕릉이 위치하는 서남부군의 묘역은 중국 남조의 영향이 보이며 기존 횡혈식 석실묘를 사용하는 귀족층과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또한 '왕릉원' 내에서 추가적인 매장시설이 발견되고 있는 만큼 웅진기 왕릉에 대한 조사가 더욱 심화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기조강연 '백제 고분 연구의 쟁점과 향후과제'
◇ 사비기 고분
백제가 도읍을 지금의 부여로 옮겼을 때의 왕릉급 고분으로는 부여 왕릉원의 18기에 익산 쌍릉의 2기를 더하여 총 20기가 꼽힌다. 대체로 소위 '능산리식 석실'이라는 단면 육각형·평면 장방형의 횡혈식 석실묘가 정형화되는 시기라 설명된다. 각각의 무덤의 선후 관계를 가르는 것은 천정 구조와 단·합장 여부이다.
발표를 맡은 서현주 교수는 부여 왕릉원의 묘군을 서·중·동 고분군으로 나누고 중앙→동고분군→서고분으로의 축조가 점진적이면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이고 이 중 피장자에 대한 논의가 있는 중앙고분군의 중하총(2호분)과 동하총(1호분), 익산 쌍릉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했다.
중하총은 성왕(재위 523~554)이거나 그 왕후일 가능성을 살펴보았고, 동하총은 기존의 위덕왕설을 회수하고 고구려와의 관계가 있었던 왕족의 무덤으로 판단하였다. 쌍릉은 대왕릉에서 남성 노인의 유골이 검출되어 무왕의 것이 확실시되고 있으나, 소왕릉의 피장자에는 미륵사 서탑 명문사리기에 언급된 사택씨 왕후, 삼국유사의 선화공주, 혹은 제3의 인물이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발표자는 사택씨 왕후로 보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7세기 이후 석실묘가 합장에서 단장으로 변화하는 모습에도 주목하여 이는 추가장의 소멸의 의미하는 것으로 2차장인 빈(殯)이 축소되는 매장의례의 간소화에 따른 장법의 변화로 추정했다.
쟁점백제사 학술회의는 백제 고고·역사의 중요 현안과 쟁점 사안을 주제로 선정하여 집중 토론하는 자리로서 2012년부터 매년 두 차례 개최되어 오고 있다. 참석자들로부터 행사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다음 회의의 주제를 선정하고 계속해서 백제사의 다각적인 복원을 시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