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는 예림, 오례, 모례, 운례, 발례 ,명례, 고례, 가례, 시례, 예촌 등과 같이 마을 이름에 예(禮) 자가 들어 있는 곳이 유난히 많다. 그만큼 밀양의 선조들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예(禮)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실천 하기 위해 마을 이름에까지 새기면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란 은행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늦가을 오후에 밀양시 교동 모례마을에 있는 오연정(鼇淵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을 찾았다. 오연정은 조선조 명종 때 문신인 추천 손영제(孫英濟, 1521∼1588)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강학했던 곳이다. 이곳은 밀양강을 사이에 두고 기회 송림과 마주하는 추화산 기슭의 끝자락에 위치해 풍수적으로 물이 부딪혀 휘돌아나가는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을 피하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곳)의 명당이다.

오연정 입구(안내판)

선생의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덕유(德裕), 호는 추천(鄒川)으로 고려 개국공신 광리군 손긍훈(孫兢訓)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內職)으로 성균관 전적, 예조·병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외직(外職)으로는 김제⸱울산 군수, 예안 현감을 지냈다.

1569년(선조 2) 예안(禮安) 현감으로 부임하여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학규(學規) 수십 조를 정하여 게시하는 등 예안의 풍속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4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한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이황과 그의 문인들에 관하여 기록한 책) 앞부분에 선생의 이름이 당당하게 실려 있어 도산 유림의 손으로 퇴계(退溪)를 빛낸 제자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날마다 스승 퇴계를 사모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정자를 짓고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모례(募禮)로, 마을 앞 냇물을 추천(鄒川)으로, 그리고 마을 뒷산을 모례산(募禮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례는 예안의 도산(陶山)을 경모한다는 뜻으로 도산은 퇴계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호(號) ‘추천’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본받겠다’라는 다짐으로, 추(鄒)는 맹자의 출생지인 추나라를 뜻한다. 얼마나 스승을 그리워했으면 자신이 사는 마을과 그 마을 뒷산의 이름을 모례라고 했을까?

오연정 전경

오연정의 창건 연대는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1580년대로 추정하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재건했으나 또다시 소실(燒失)되어 1771년(영조 47) 8세손 행남 손갑동(孫甲東, 1743∼?))이 복원하였다. 이후 순조 연간(1800〜1834)에 유림의 뜻을 모아 경내에 모례서원(慕禮書院)을 세웠으나 고종 때 훼철되고, 1935년의 화재로 요사채 일부만 남게 되었다가 1936년 후손들이 경역(境域)을 확장해 중건하였다.

1997년에는 문중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문집·책판의 보관을 위한 연상판각(淵上版閣)을 새로 건립하고, 사당(祠堂, 경현사)이 있던 자리에 모례서원경현사유지비(慕禮書院景賢祠遺趾碑)를 세웠다. 한편, 이곳에 있었던 모례서원은 현재 고직사(庫直舍)에 걸려 있는 강당 현판 취정당(就正堂, 스승에게 나아감)과 동‧서재 현판 양진재(養眞齋, 마음을 닦음)와 경행재(景行齋, 행실을 닦음), 문루(門樓) 현판 영풍루(迎風樓), 그리고 연상판각, 오연정 등 남아 있는 현판‧건물들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서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이 서원이었음을 알 수 있는 큰 은행나무 여러 그루가 있는 행단(杏壇)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례서원경현사유지비

정당(正堂) 오연정은 북향의 ‘ㄱ’자형 평면 건물로 돌출부는 누마루로 북쪽에는 남벽루(灠碧樓, 위창 오세창 글씨, ‘푸르름을 잡다’는 의미로 퇴계 선생을 향한 변하지 않는 존모의 뜻을 나타냄), 측면에는 영풍루(迎風樓, 바람을 맞이하는 누각), 안쪽에는 빙호추월(氷壺秋月, ‘어름 항아리에 들어 있는 가을 달’이란 뜻으로 ‘청렴결백한 선비의 마음’을 표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대청마루로 된 건물 중앙 부분의 2칸에는 성당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조선말∼근대에 활동한 당대 최고의 서화가, 1920년 동아일보 창간호 제호, 제자로는 이당 김은호, 소전 손재형, 심산 노수현 등)가 쓴 오연정(鼇淵亭)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양쪽에는 각각 2칸씩의 온돌방을 두고 방의 앞뒤로 마루를 낸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선생의 행적(行蹟)과 문집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200년이 지난 후에 자손들과 도산서원 등의 노력으로 그 행적의 일부가 밝혀졌다. 1820년(순조 20) 퇴계의 후손 광뢰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이 자신의 집안에 전하는 편지들을 근거로 지은 추천의 행장(行狀)이 가장 상세하다. 광뢰(廣瀨)는 “추천이 도산서원을 창립한 것이 송나라의 유극장(劉克莊, 1187~1269)이 주자의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세우고, 한보(韓補)가 주자의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운 것과 그 공로가 같다.”라고 하였다.

추천의 생몰연대는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문집에서 밝혀냈고, 추천이란 호는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의 문집에서 찾아냈다. 정재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이 쓴 모례서원 경현사 상향축문에는 이렇게 전한다. 「도산에서 경전을 배우고(陶山執經, 도산집경), 오연에서 덕을 기르셨네(鼇淵養德, 오연양덕). 사당 세워 선현을 받드니(倡祠崇賢, 입사숭현), 후학에게 남기신 덕이 있다오(功在後學, 공존후학).」

추천은 예안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학교를 보수하고 교육에 힘쓰면서 학문과 정치에 대한 퇴계의 교화(敎化)를 받고 도산서당의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천연대(天淵臺) 사이를 수없이 돌면서 사색과 탐구에 몰두하여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1570년(선조 3) 퇴계가 운명하자 몸소 염(殮)하고 입관(入棺)에 참여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직접 제문을 지어 이렇게 애도(哀悼)하였다. 「아! 늦게 태어나 고루한 사람이, 도(道) 있는 분에게 친근함을 얻었습니다(嗚呼晩生 孤陋 獲親有道, 오호만생 고루 획친유도). 높은 산 같은 덕과 큰길 같은 도는 지닌 떳떳한 본성에서 좋아하는 바입니다(高山景行秉攸好, 고산경행병유호). 의심으로 통하지 못하는 곳을 점괘 풀 듯 어리석음을 계발하여 주셨습니다(有疑不通 如筮發蒙, 유의불통 여서발몽). 하늘은 선생 한 분을 남겨 놓지 않아 덕성 이룸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天不遺 考德無, 천불유 고덕무종종). 대들보가 무너지고 철인이 쇠하니, 혈기 있는 생명은 모두 애통해하는 바입니다(梁頹哲萎 含血所痛, 양퇴철위 함혈소통).」

1574년(선조 7) 추천은 퇴계 사후에 4년을 더 예안 현감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봉급을 털어 설월당 김부륜(金富倫, 1531~1598) 등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추천은 벗을 돕는 우정도 각별하였다. 월천 조목(趙穆, 1524∼1606)과 성재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상(喪)을 당해 형편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널을 제작할 나무를 부조(扶助)하였다. 특히, 밀양 부사 약봉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이 지은 ‘송계신계성여표문(松溪申季誠閭表文)’에 의하면 송계 선생 여표비 건립 계획을 주도한 사람도 추천이라는 것을 보면 그는 당시에 호걸풍(豪傑風)의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문집으로 추천집(鄒川集)이 있다.

지금도 오연정에서 보면 퇴계 선생의 자문으로 세운 덕성서원(점필서원, 예림서원)이 있었던 산자락이 건너다보인다. 추천은 그곳을 바라보면서 이곳의 예(禮)와 덕(德)이 온 고을로 널리 퍼져나가 이 고장을 ‘예(禮)의 숲(林)’으로 만들고 싶었으리라. 사람의 향(香)이 그리운 날엔 추천(鄒川)이 내려다보이는 오연정의 뜰을 거닐어보자. 그 옛날 예안을 늘 그리워했던 선생이 우리에게 남겨둔 모례(慕禮)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