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25년은 1945년 광복으로부터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이를 기념하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원장 임종덕)은 9월 11일(목)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대강당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주요유적 발굴조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일제강점기에 이뤄졌던 한반도 고고학을 진단했다.
본격적 논의에 앞서,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일제강점기 한국 유적 조사 현황과 과제의 극복」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진행했다.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발굴조사를 1기(~1915), 2기(1916~1934), 3기(1935~1945)의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별 주요 발굴 성과와 주요 발굴 관계자들에 대해서 논했다. 그러면서 발굴조사된 유적에 비해 간행된 보고서는 턱없이 적은 숫자이며, 발굴자료는 거의 공개되지 않고 소수만이 독점했고 발굴조사원 중에는 한국인이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점을 꼽아 일제강점기 고고발굴이 한국 고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을 일축했다. 더군다나 졸속 발굴로 인해 해방 이후에도 민간에 도굴이 성행하는 병폐를 조성하고 말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또한 현재의 한국 고고학계에서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 중 만선사관(중국 동북지역의 역사 변동에 따라 한반도의 역사가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과 낙랑군을 한국 고고학에서 제외시켰던 과거의 경향이 점차 수정되어 앞으로는 새로운 시대 구분이 논의되어야 함을 남은 과제로 제시했다.
이어 일제강점기의 고고발굴에 대한 4개의 주제 발표 ▲ 일제강점기 석기시대 유적 조사 현황과 그 의미(이기성, 한국전통문화대) ▲ 일제강점기 고구려·낙랑 유적의 고고학 조사 현황(강현숙, 동국대) ▲ 일제강점기 백제·마한 유적 고고학 조사 현황(이정호, 동신대) ▲ 일제강점기 신라·가야유적 고고학 조사 현황(차순철, 서라벌문화유산연구원)가 이어졌다.
일제 고고학이 낙랑과 가야에 집중한 이유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수의 유적이 조사되었지만, 조사 내용이 구체적으로 보고서로 작성되어 대중에 발표된 경우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제 고고학자들의 주요 관심은 낙랑과 가야 유적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대 한나라의 식민지'로서의 낙랑군과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던 목적이 뚜렷이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한나라 양식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던 평양의 낙랑 고분들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 '임나일본부'나 왜와의 뚜렷한 연관성을 찾는데 실패하자 가야에 대한 고고연구는 중단되고 말았다.
심지어 한반도의 석기시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蔵)의 경우에도, 그의 관심은 야요이 토기 사용집단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유일본인'을 증명하는데 맞춰져 결과적으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설)'로 이어졌다. 반면 같은 석기시대를 연구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경우에는 무문토기 외의 여러 토기들을 모두 외래계로 파악하여 외부로부터 금속문화가 전파된 금석병용기를 설정하여 식민사관의 한 축인 타율성론(한반도의 역사는 외래 영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이론)을 구성하게 되었다.
광복 80년에도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이번 학술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다같이 입을 모아 일제강점기 진행된 고고학 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상마저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자료가 파편화되고 흩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록 2000년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보고』와 『유리건판 자료집』 등을 간행하고 인터넷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와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을 서비스하고 있지만, 사업별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의 전체상을 알기 어렵다.
이기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단행본, 논문, 도록 등의 학술자료를 특정 기관에서 총괄하여 정리하고 공개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는데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을 가장 적합한 곳으로 꼽았다. 특히 국외에 반출되어 있는 개인 소장 자료들도 폭넓게 점검하여 수집하여 보고서로 남지 않은 일제강점기 고고조사의 현황을 복원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은 젊은 연구자들의 자료접근의 허들을 낮출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고 유적 분포를 파악하는데도 1차 사료로써 쓰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백제와 마한 유적 고고조사에 대해 발표한 이정호 동신대 교수도 새로운 고분 발굴에 힘쓰는 것보다 일제강점기 발굴된 내용들이 소략한 보고 내용, 고분의 명칭, 조사 내용의 보고에 혼선이 있으므로 이를 재조사하고 정리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수 있다는 점을 당부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에서 서비스 중인
『1909 조선고적조사의 기억:<한홍엽>과 야쓰이 세이이쓰의 조사기록』
일제강점기 고고조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차순철 서라벌문화유산연구원 조사단장에 따르면,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조사보고된 고분의 수는 3천 여 기에 해당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것은 50여 기 정도로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다. 비록 금관총 등 세상을 놀라게 한 발굴이 일제강점기에 있었지만, 오히려 해방 이후에 우리 손으로 신라 왕경과 신라사찰 등의 변화 등을 복원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신라 고고학을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고고연구는 전체적 한국 고고학의 큰 그림 속에서는 연구사적 측면 외에는 큰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주제 발표 이후 이어진 「고령 지산동 고분군 5호분 재발굴조사」 (정인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부여 왕릉원 재발굴조사 성과」 (형유진·오동선,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두 발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고고발굴이 현재 우리 학계의 손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또 극복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로서의 의미있는 발표였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서비스 중인 공공정보 서비스 「국가유산 지식이음」에서 누구나 열람 가능한 『1909 조선고적조사의 기억:<한홍엽(韓紅葉)>과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의 조사기록』은 일제강점기 일본관학자들의 한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로, 본 학술대회에서 여러 발표자들에 의해 바람직한 일제강점기 자료정리 사업으로 언급되었다. 앞으로 일제강점기 고고조사의 전체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꼼꼼한 자료 정리와 면밀한 타임라인 정리가 조속히 추진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