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에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개창하였고, 북부여 출신이니···"(「광개토왕비」)
"동이(東夷)의 옛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는데···"(『삼국지』 동이전)
"(백제 성왕) 16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가 그 계승자를 표방했다는 문헌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어, 부여는 고조선과 나란히 한국사의 여명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2월 19일(금)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는 백산학회(회장 이종수)와 한국고대학회(회장 양정석) 공동 주최로 「부여에서 삼국으로: 부여인의 유산과 그 계승」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그간 고구려나 백제의 관점에서 본 부여 계승성에 관한 학술회의는 종종 있었지만, 부여를 주체로 삼국으로의 계승 문제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본격적 발표에 앞서, 백산학회 이종수 회장(단국대 교수)은 부여사 전공자로서 「부여인의 유산과 그 계승」을 주제로 지금까지의 부여에 대한 고고학 연구를 정리하는 기조강연을 펼쳤다. 중국의 부여 고고학 1세대들이 사망하거나 퇴임하는 등의 이유로 모아산 고분을 비롯한 부여 관련 보고서의 출간이 2020년대 이후 멈춰있는 점 등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부여 문화에 보이는 북방문화 요소가 고구려보다 강하다는 사실과 부여 유적으로 보아왔던 몇몇 유적들에 대한 의문점 등을 제시했다.
주제발표는 고고학과 문헌사를 아우르는 총 7인의 소장학자가 나서 ▲「마한과 백제의 유물·유적에서 보이는 부여문화의 계승성」(오대양, 단국대), ▲「가야지역 북방계 유물과 부여 기원설의 검토」 (한진성, 경희대), ▲「고구려사의 전개와 부여계 주민 집단의 위상」(장병진, 경상국립대), ▲「백제 부여씨 왕실의 기원과 북조 지역 이주민」(이장웅, 건국대), ▲「5~6세기 물길의 부여 진출과 두막루」(이종록, 고려대), ▲「고려·조선 시기 부여사 인식의 변천」(이승호, 동국대), ▲「고구려 물질문화에 나타난 부여 문화의 계승 관계 검토」(양시은, 충북대)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종합토론에서는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 실장이 좌장을 맡고, 박경신(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위가야(동북아역사재단), 이규호(동북아역사재단), 이정빈(경희대), 강인욱(경희대), 이준성(경북대), 기경량(카톨릭대) 등의 전문가가 토론을 맡아 부여 문화의 계승에 대해서 의미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가야지역 북방계 유물과 부여 기원설의 검토」 (한진성, 경희대)
부여가 고구려나 백제 등으로 계승된 고고학적 흔적은 의외로 찾기 힘들어···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고구려, 백제·마한, 가야 등 고고문화에 보이는 부여의 영향을 점검하는 발표(오대양, 한진성, 양시은)가 준비되었으나, 부여와의 고고학적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공통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 주목된다. 삼국시대 유적·유물에 북방계로 볼 만한 문화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부여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단선적·일원적이 아닌 복합적이고 혼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오대양(단국대)은 백제·마한과 부여의 고고문화의 접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기존 연구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 길림 중심부가 아닌 환인지역의 졸본부여와의 고고문화 비교를 시도했다. 모든 북방계 요소가 부여계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황산둔·노하심-용두산·망강루-운양동·오송으로 이어지는 고고학적 연결을 진번-부여-졸본부여·고구려-마한·백제로 이어지는 북방계 집단의 이동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론자인 박경신(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들 유적들은 공통점보다는 계통적 차이가 뚜렷하다며, 백제의 '부여 계승성'이 후대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상징적 계승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다.
한진성(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은 소위 북방계 혹은 흉노계 유물로 알려져 있는 '동복(銅鍑)'이 가야지역에서 나온 것을 중심으로 부여 기원설에 대한 검토를 진행했다. 비록 동복이 김해 대성동 29호분·47호분, 김해 양동리 235호분 등에서 보고되고 있으나, 동복이 북방 문화의 핵심 표지 유물이라 할 수 없으며, 동물뼈가 나오는 북방 민족의 동복과 달리 김해 지역 출토의 동복에서는 밤이나 곡물이 나오고 있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북방기원설이 논의되고 있는 가야지역의 마구 유물도 폭넓게 고려하면 부여로부터 직접 계승했다기 보다는 부여 외에도 선비, 삼연 등의 여러 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혼합된 유입으로 파악되며 특정 유물의 존재가 북방민족의 남하를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양시은(충북대)의 발표도 문헌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밀접하게 나오며 초기 고구려 장신구에서 부여와의 관련성이 인정되지만, 성곽이나 무덤 등에서는 고구려와 부여의 직접적인 계승 관계는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토론을 맡은 기경량(카톨릭대)은 귀걸이와 같은 귀중품은 교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것을 근거로 이주민의 존재를 얘기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강인욱(경희대)은 종합토론에서 부여 이주민이 남하했더라도 기존의 물질 문화를 구현할 수 없었을 전혀 다른 생태 조건을 고려한다면 부여 문화의 계승은 삼국에 영향을 준 '선민의식'에서 찾아야 하며 고고문화의 부재는 오히려 그 증거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부여 관계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번 학술회의의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발표자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역사 해석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입장에 선 반면, 토론자들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었다.
장병진(경상국립대)는 고구려 건국 설화에 나타난 '부여 출자' 전승을 대무신왕 이후 부여가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거나 부용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계루부 왕실과 부여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한편 이장웅(건국대)는 백제의 부여 출자의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부여 유민의 백제 이주 가능성을 검토하여 '백제 요서 경략설'을 새롭게 뒤집어 볼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논점은 『삼국사기』 초기기사의 신빙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지로 모아졌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 출자의식을 고구려·백제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할 때 어느 정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장병진(경상국립대)이나 이승호(동국대)는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문헌기록의 성립시점과 전거 자료를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정빈(경희대)의 의견 차가 있었다.
「5~6세기 물길의 부여 진출과 두막루」(이종록, 고려대)
더 다양한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전체적인 북방사를 바라볼 필요 있어····
부여 자신들이 남긴 역사 기록이 없고 그 영역마저 논란이 있는 상태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안개 속에 남겨져 있는 듯한 부여사의 모호함 때문에 삼국으로의 계승성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전문 연구자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특히 여러 발표와 토론에서 북방 문화를 좀더 세분화하여 접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부여의 후계자를 주장한 제3의 세력인 '두막루(豆莫婁)'와 부여의 적대세력 중 하나였던 '물길'에 대한 분석을 보여준 이종록(고려대)의 발표는 이러한 난점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예시를 보여준 것 같다. 단선적인 계승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고대 문명의 교류와 역학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는 부여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 한국사적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종합토론이 끝나기까지 회의장은 청중들로 가득 차 부여에 대한 학술적 목마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부여에 대한 더 다양한 주제의 학술회의가 기획되어 이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